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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남도의 겨울…진도 운림산방과 용장성

송고시간2019-01-1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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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 진도를 찾은 날은 절기상 '대설'이었다. 대설에 맞춰 진도에 첫눈이 내렸는데 말 그대로 대설이었다. 대설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동시에 발효됐다.

남도 여행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덕분에 대가의 화실은 더욱 운치 있게, 몽골군에 쫓겨 내려온 삼별초 항쟁의 흔적은 더욱 쓸쓸하게 살아났다.

눈 내리는 운림서원 [사진/전수영 기자]

눈 내리는 운림서원 [사진/전수영 기자]

추사와 초의를 그리워한 소치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은 20대 후반 해남 대흥사에 있던 초의선사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히기 시작했다. 30대 초반에야 초의를 통해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서화 공부를 했다.

추사는 중국 대화가 대치(大痴) 황공망과 비교해 '소치'(小痴)라는 아호를 직접 지어주고,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고 극찬했다.

운림산방(명승 제80호)은 서울에서 귀향한 소치가 말년을 보낸 화실이다. 소치 이후 5대가 200년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화맥을 이어오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앞에 두고 잠시 멈춰섰다. 그 자리에서 이평기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을 따라 첨찰산 아래 터를 잡은 운림산방과 그 앞 연못과 다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니 소치의 대표작 '운림각도'(雲林閣圖, 1866)에 담긴 풍경 그대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첨찰산의 상록수림이 눈발 사이에서 더욱 푸르다.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안개가 구름숲(雲林)을 이루었다는 이곳은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이 1982년 복원했다.

'운림'은 소치가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던 원나라 화가 예찬의 호이기도 하다. 산방 앞의 연못과 뒤편의 생가를 둘러싼 동백나무,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목련, 매화나무, 모과나무, 팽나무, 꽃사과나무, 목서 등 다양한 수목이 수려하다.

연못 한가운데 돌로 쌓은 작은 섬에는 소치가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백일홍)가 있고, 물 위에는 수련이 떠 있다.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다'라는 꽃말을 가진 배롱나무는 추사를, 차로 마시는 수련은 다성(茶聖) 초의를 기리는 의미라고 한다.

눈발 속에서 첨찰산의 상록수가 더욱 푸르다. [사진/전수영 기자]

눈발 속에서 첨찰산의 상록수가 더욱 푸르다. [사진/전수영 기자]

물이 되고 눈이 되고 안개가 되는 여백

소치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걸려 있는 그림은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다. 문인이 의중을 담아 수묵담채로 그린 산수화에 시를 더한 19세기 남종화의 절정을 이룬 추사의 대표작이다.

귀양 중인 자신에게 중국에서 구한 귀한 책을 가져다준 제자, 역관 이상적에게 자신의 처지와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려준 그림이다.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는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어려운 시절에 변치 않는 제자에게 감사해하며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는 인장까지 더하니 사제 간의 자별한 마음이 더욱 애절하다.

세한도는 일본인 추사 연구가 후지스카 지카시의 손에 넘어갔다가 진도 출신 서예가이자 고서화 수집가인 소전 손재형이 거액을 주고 되찾아 왔다. 손재형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는 얼마 뒤 후지스카 연구실 화재로 재가 되어버렸을 테니 진도와의 인연도 적지 않다.

소치와 아들 미산, 손자 남농과 임인의 그림을 둘러보는데 이 해설사의 설명 덕에 학창시절 배웠던 한국화의 '여백의 미'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세한도의 여백이 한겨울의 추위가 되듯, 산의 여백은 안개가 되고 눈이 된다. 폭포의 여백은 그대로 물이기도 하고 물보라이기도 하다.

댓잎이 한쪽으로 쏠려있으면 여백은 바람이 되고, 댓잎이 아래를 향하면 여백은 비나 눈이 되니 그 무궁한 사유와 멋이 새삼 감탄스럽다.

용장성의 산책로 [사진/전수영 기자]

용장성의 산책로 [사진/전수영 기자]

빈 궁터를 싸목싸목 걷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눈발을 헤치고 용장성으로 향했다. 진도 용장성(사적 제126호)은 고려 시대 대몽 항쟁을 이끌었던 삼별초의 근거지였다.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는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1232년)한 이후 대몽 항쟁의 주축이었다.

1270년 정권을 되찾은 원종이 몽골의 뜻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하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 배중손은 원종의 6촌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몽골과 고려 왕정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용장성에 터를 잡고 용장사를 궁궐로 삼은 삼별초는 이곳에서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고, 결국 1273년 제주에서 전멸했다. 신식 화기로 무장한 몽골군과의 전투로 용장성은 모두 불타버렸다.

길이가 13㎞에 달하던 옛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성의 부분적인 형태와 계단식으로 만든 궁터에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는 용샘에는 도롱뇽과 개구리가 살고 있다.

궁터 주변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는 싸목싸목('천천히'라는 뜻의 전남 방언) 걷기 좋다. 발굴 당시 출토된 기왓장을 산책로 한쪽에 쌓아뒀는데, 원래 검은색이었을 기왓장이 불기운에 연탄재처럼 허옇게 바래고 초록빛으로 이끼가 앉았다.

북향으로 자리한 궁터의 맨 위에 오르니 북쪽에서 세찬 바람이 거칠 것 없이 불어닥쳤다. 꽤 많은 눈이 내렸지만, 영상의 기온에다 거센 바람에 휘날리느라 쌓일 새가 없다.

내려가는 길은 후박나무가 근사하다. 잎이 넓은 상록수인 후박나무는 눈보라 속에서도 든든하다. 진도군 군목이기도 한 후박나무는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방풍림으로 많이 심고, 껍질은 약재로도 쓰인다.

내리막길의 마지막 계단은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남도에서 흔히 보는 동백꽃이지만 눈보라 속에서 마주하니 피어있는 꽃도 떨어진 꽃도 새삼 붉고 처연하다.

주춧돌만 남은 용장성터 [사진/전수영 기자]

주춧돌만 남은 용장성터 [사진/전수영 기자]

일몰 명소 세방낙조, 겨울엔 급치산 전망대

진도의 서쪽 끝 일몰 명소인 세방낙조는 진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에 있다. 메타세쿼이아와 야자수가 가로수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점점이 섬이 떠 있는 바다도 매 순간 풍경을 달리한다.

바다로 지는 해는 어느 곳이든 아름답겠지만, 세방낙조가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다도해를 배경으로 철에 따라 해가 몸을 숨기는 곳이 이 섬 사이에서 저 섬 사이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겨울에는 섬 사이 바다가 아닌 왼편 마을 뒤로 사라지기 때문에 겨울 낙조를 제대로 보려면 급치산 전망대가 좋다고 이 해설사가 추천했다.

세방낙조에서 약 4㎞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다 유턴에 가까운 우회전을 하면 급치산 전망대가 있다. 이름 그대로 급한(急) 고개(峙)다.

전망대 자체는 그리 운치 있는 건물은 아니지만, 진도의 다도해를 즐기기에는 세방낙조 이상일 법하다. 그러나 때맞춰 다시 휘몰아치는 눈보라 덕에 이날의 전망대는 섬의 윤곽만 흐릿하게 보이는 수묵화를 선사했다.

뒤돌아 내려오는 길, 바로 보이는 바위산인 동석산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높이는 217m에 불과하지만 높이를 압도하는 기세가 만만찮다.

다음날 오전, 이틀째 내린 눈이 포근하게 대지를 덮은 남도를 뒤로하고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 길. 서울에서는 영하 15도의 동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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