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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이매진] 이윤을 남기지 않는 삶…구례로 내려간 그들

송고시간2019-01-1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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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각박한 삶이 싫어 조용히 도시를 떠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서서히 잊혀 갔다. 가끔 날아오는 농산물 판매 문자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을 뿐이었다.

그들이 잘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귀촌·귀농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전남 구례를 찾아가 도시를 떠난 2명의 생활을 살펴봤다. '귀농하면 몇억원을 벌 수 있다'는 등 황금빛 소개는 지양하고 그들의 솔직한 속내를 취재했다.

원유헌 씨가 마늘밭에 왕겨를 뿌리고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원유헌 씨가 마늘밭에 왕겨를 뿌리고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나이 마흔다섯에 전남 구례로 귀농한 원유헌(52.자연농장 수레 대표)씨. 번듯이 잘 다니던 언론사 기자 생활을 접고 전남 구례로 홀연히 떠난 지 7년째다.

왜 떠났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지만, 그 속내가 자못 궁금해 구례에 직접 가보기로 했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씩 생겨나고 있다. 내 주위엔 극히 적은 숫자지만, 인기 있는 귀촌·귀농지엔 그런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KTX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그로부터 문자가 왔다. 한 중학교로부터 강연을 의뢰받아 지금 강연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귀농하면서 그냥 보통 농부가 되고자 했지만, 역시 그냥 보통 농부는 아니었다.

기차에서 내려 바로 학교로 취재를 가려 했지만, 한사코 사양한다. 학교 측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겠다는 것이다. 서울의 취재현장에서라면 어떻게든 취재원을 설득했겠지만, 여긴 달랐다. 구례 아닌가? 게다가 그는 원칙을 중요시하던 사람이다.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직장에서 1천만원 이상 연봉을 올려주는 조건으로 연봉제 전환을 유도했다고 한다. 그는 '당장 생길 돈으로 뭐 할 게 있겠느냐 싶어' 그냥 호봉제로 남는 편에 섰다.

노조원 가운데 30%가량은 함께 남겠거니 생각했지만, 실제로 남은 숫자는 3%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랬다. 그는 그 3% 쪽에 서는 사람이었다.

구례구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탔다. 읍으로 가기 위해선 약 5㎞가량을 차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버스에 올라탄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사투리가 두 종류였다. 전라남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다. 역시 구례는 지리산 자락이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 순간이었다. 이쪽은 양 지역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이다. 전라도이긴 하지만 인접한 곳이 경남 하동이라 사람들 간의 왕래가 잦았다.

버스터미널에서 오랜만에 본 원유헌 씨는 달라진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강연을 잘 마치고 돌아온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하곤 그가 모는 포터 트럭에 올라탔다.

수동 트럭 운전이 익숙해진 원유헌 씨 [사진/성연재 기자]

수동 트럭 운전이 익숙해진 원유헌 씨 [사진/성연재 기자]

천생 농부…구례에서 다시 기자가 되다

몇 년 전 저렴한 가격에 나온 트럭을 인수했다고 한다. 실전이 곧 연습이었기에, 그는 이제 수동기어 차량을 잘도 몬다.

지리산 천왕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구례읍 산성리 쪽에 그의 밭이 있었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 개 한 마리를 밭에다 놓고 기르는데 차에서 내리니 그 녀석이 너무도 반갑게 폴짝폴짝 뛴다. 원씨는 진돗개라고 불렀지만 사실 진돗개 피가 아주 약간 섞인 잡종견처럼 보였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곧이어 마늘을 심어야 해서 경운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경운 작업을 마친 그는 양파를 미리 심어놓은 밭에 왕겨를 뿌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밭 입구에 산더미처럼 자리 잡고 있던 자루에 든 것이 왕겨였다. 동해를 방지하기 위해 양파와 비닐 멀칭 사이 부분을 왕겨를 써서 채워주는 작업이다.

그는 왕겨를 또 다른 용도로 쓰기도 한다. 왕겨 더미에 불을 붙인 뒤 태워 왕겨숯을 만든다. 그는 이를 왕겨 훈탄이라 불렀다. 왕겨 훈탄은 수분을 다량 머금어 작물이 마르는 것을 방지하고, 물을 정화해주는 작용까지 한다.

자료에 따르면 훈탄이 수분을 머금는 양이 자체 부피의 680%에 달한다는 것이다. 원씨는 밭 한쪽에서 직접 왕겨숯을 만들어 밭에 뿌려놓기도 했다.

농한기라 해야 할 일은 바로 끝났다.

굵디굵은 그의 손가락이 자꾸 눈에 들어와 셔터를 눌렀더니 신경이 쓰였는지 한마디 한다. "이 손가락은 원래 그랬네. 서울서 노트북 두드릴 때도 그랬으니 신경 쓰지 말게." 그의 굵은 손가락의 용처를 다시 확인한 것은 다음날이었다.

"굵은 손마디는 원래 그랬다"는 원씨 [사진/성연재 기자]

"굵은 손마디는 원래 그랬다"는 원씨 [사진/성연재 기자]

그는 취재를 나간다고 했다. 아니, 언론사 때려치우고 내려와서 다시 취재를 가다니…알고 보니 구례군에서 펴내는 계간지 '구례'에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구례향교를 찾아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연신 그 굵은 손가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20년 가까이 취재현장에 버티고 서 있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영락없는 기자의 모습이다.

다음으로는 향교 인근의 산정마을. 좁디좁은 돌담길과 그곳을 조망하기 위해 봉서 저수지 인근의 언덕배기를 오를 때도 날렵한 기자로 되돌아간 듯했다.

끼는 속일 수 없나 보다. 틈틈이 신문에 귀농 일기를 연재했던 그는 올해 결국 귀농 수필집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를 출간했다. 목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여름, 풀은 못 이기는 벱이여'와 '함부로 내려오지 마라'였다.

향교와 산정마을 취재를 마친 그는 구례에서 요즘 뜨고 있는 읍내의 목월빵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 주인장 장종근 씨 역시 고향을 벗어나 제빵기술을 연마한 뒤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취재기자 한 명이 더 왔다. 정동묵 씨라고 했다. 물어보니 그도 귀촌한 사람이었다. 대한항공 기내잡지 모닝캄을 제작했었다고 한다. 어쩐지, 군에서 펴내는 계간지치고는 깔끔하고 수준 있더라니…

몇 년 고생해 아담한 집을 지은 원유헌 씨 [사진/성연재 기자]

몇 년 고생해 아담한 집을 지은 원유헌 씨 [사진/성연재 기자]

귀농자의 꿈…'그림 같은 집을 짓고'

구례읍 동쪽에는 마산면이 있다. 서시천 위에 놓인 서시교라는 다리 하나 건너면 될 정도로 지척이다.

마산면 광평리에 있는 그의 집은 마치 세트장 같은 느낌마저 들 만큼 아름다운 동네 속에 있었다. 원래는 마산리의 논바닥이었는데 이곳에 새로 택지가 조성되면서 4년쯤 전에 건축해서 옮겨왔다고 한다.

대지가 500㎡이었다. 당시 3.3㎡당 10만원대 후반을 주고 샀다. 시세를 물었더니 엊그제 근처에서 거래된 가격이 50만원쯤이라고 한다. 땅과 건축비, 본인의 노동력도 들어가야 했으니 대략 2억여원이 들어간 셈이다.

집은 적당한 규모의 단층집인데, 하나뿐인 아들이 서울의 대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구례엔 부부만 살고 있다. 사실 집은 둘만 살기엔 꽤 넓은 편이다.

얼마 올랐느냐는 질문에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한 답변이 나온다. "뭐 하나밖에 없는데 팔고 어디 가서 새로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처음부터 이렇게 번듯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사래를 친다. 괜히 이렇게 집 지어놓고 사는 걸 보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억원이면 서울 전셋값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데…"

밭에서 뽑아 낸 무 [사진/성연재 기자]

밭에서 뽑아 낸 무 [사진/성연재 기자]

그를 일깨운 것은 히말라야

그는 왜 귀농했을까? 7년 전 그는 필자에게 말했다. 무심코 지나가듯 한 이야기를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삶의 방식을 바꿔보자 생각했던 것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을 때였다고 한다. 힘겹게 발을 옮기던 원씨는 길 한가운데서 쉬고 있던 서양인들에게 조언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그다음 목적지까지 가지 못한다"는 것이 원씨의 조언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가볍게 탁 때리는 답변을 들었다. "왜 빨리 가야 하느냐? 그렇게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즐기면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우리네 삶의 방식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도 되는데 우리는 왜 늘 쫓기듯 살아왔느냐는 생각에 미치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더란 것이다. 그래서 쫓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선택해 내려온 것이다.

하나뿐인 아이도 7년 전 잘 다니던 과천의 대안학교에서 구례로 전학을 시켰다. 이런 그에게 모순적이게도 지금 아쉬운 것이 농지라 했다.

그는 논 3천300㎡가량과 밭도 그에 준하는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농지가 더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그가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농지를 빌리려 해도 농약이 적당히 버무려진 농토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농약 끼를 빼려면 이를 최소한 3년 정도 푹 묵혀야 한다.

농지 주인들은 그러나 10년 이상 장기 계약은 꺼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윤 없는 삶'을 위해 욕심을 버리고 내려간 그가 농지 욕심을 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게다가 땅 주인들은 웬만해선 땅을 내놓지 않으려고 한다.

얼마나 버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얼마나 법니까?"

그는 약간 망설이다 대답했다. "많지 않다. 혼자 벌이로 연간 2천만원쯤 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부인도 상담치유 쪽 일을 하고 있어 살림에 보태니 부족하진 않다고 했다. 저축 액수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부부가 사는 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을 정도로 번다고 했다.

도시 생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액수처럼 보이지만, 쓰는 게 적으니 크게 모자라지는 않다고 한다. 올 1월에는 스페인으로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은 수입과 지출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지만 처음에는 고정비용이 많이 들었다. 농기계 등 갖춰야 할 것이 너무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호미 하나도 사다 놓으면 어느 틈에 없어진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난 것만 해도 저장고 300만원, 트럭 200만원 등 굵직굵직한 것들이 들어갔다.

그는 "차라리 귀농 인구들을 위해 '귀농 세트' 같은 것을 팔았으면 싶을 정도"라고 말한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귀농이 처음인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농기구가 필요한지, 어떤 약제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중복투자도 많다고 한다.

로터리 작업을 하는 원유헌 씨 [사진/성연재 기자]

로터리 작업을 하는 원유헌 씨 [사진/성연재 기자]

귀농자들의 밤

원유헌 씨 소개로 귀촌한 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한 곳을 찾았다. 화엄사에서 2㎞ 아래쪽에 자리 잡은 게스트하우스 다락방(茶樂房)은 차 판매점을 겸하고 있다.

소개해 준 원씨와 차 판매점 주인 허재용(55)씨 등과 함께 차를 마시다 보니 부부 한 쌍이 자리로 찾아왔다. 소개를 해주는데 운조루 주인 류정수(55)씨 부부라 한다.

"어! 운조루…" 필자가 반색한 이유는, 운조루가 구례에서 가장 유명한 고택이었고, 몇 년 전 직접 방문해 기사로 다루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낙안 부사를 지냈던 안동 출신의 류이주가 지은 99칸 집이다. 토지면의 평야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자리에 있는 이 집의 핵심은 의외로 부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쌀독이다. 누구라도 퍼갈 수 있다는 뜻으로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이름을 붙였다.

운조루가 있는 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형상이라 해서 타고난 명당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류씨도 알고 보니 외부로 나가 직장생활을 10여 년 하다가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귀농한 케이스다. 그 또한 유기농으로 쌀농사를 짓는다며 논에서 자생하는 곤충 사진도 보여줬다. 귀농·귀촌자들은 밤늦도록 차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차(茶)로 귀촌한 허재용 씨

수년 전 귀촌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허씨의 경우도 특이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치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좋을 만한 비주얼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 소개는 뒤로 돌리고 대뜸 그가 운영하는 차 판매점 한쪽에 의자를 내줬다. 많은 차 종류 가운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의외로 중국에서 생산된 보이차다.

서울서 찻집을 운영하던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로감을 느꼈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지리산 자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현재 세 들어 운영하는 차 판매점 뒤로 건물 두 채를 잇달아 매입했다. 두 채를 터서 한쪽을 게스트하우스로 쓰고 있고, 나머지는 마치 널따란 스튜디오 같은 느낌으로 리모델링했다.

스튜디오 1층은 웅장한 오디오 기기가 자리 잡고 있었고, 2층은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을 모셔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쓴다고 했다.

얼핏 봐도 꽤 넓을 것 같아 물어봤더니 두 건물을 합쳐 300㎡가량이나 된다는 것이다.

운이 좋아 2억여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인수했다고 했다.

50대 초반의 남자에게 본인이 좋아하는 오디오와 차라는 두 가지를 모두 즐길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실로 부럽게 느껴졌다. 때마다 손님이 찾아오면 차를 대접하고 정담을 나누는 삶이란 누군가가 다 꿈꾸는 것 아닐까?

부럽다는 말 한마디에 그는 손사래를 친다.

"아이고 제가 그래서 혼자 살잖아요."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침향 [사진/성연재 기자]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침향 [사진/성연재 기자]

유장하고 우아한 침향(沈香)과 차향(茶香)

이 게스트하우스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수많은 게스트하우스가 장점으로 내세우는 조식 서비스가 없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이 불러 나갔더니 차를 한잔 하잔다. 조식 대신 조차(朝茶) 서비스라고 한다.

그는 차를 따르기 전 침향(沈香) 하나에 불을 붙여 향로에 떨어뜨렸다. 침향은 열대지역의 팥꽃나무와 침향나무를 가공한 향으로, '잠길 침(沈)'자를 쓴다.
기운이 들뜰 때 침향을 맡으면 몸과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향이 타면서 흐르는 연기가 우아했다. 연기의 선이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가격을 물었더니, 묻지 말라고 한다. 꽤 비싸다는 이야기다.

가만 생각하니 차를 마시는 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차 온도가 아주 뜨거워 후후 불어야 겨우 마실 정도였다. 그는 "차를 후후 불어 아주 뜨겁게 드시라"고 권했다. 차도(茶道)는 잘 몰랐지만 차 마시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이 느껴졌다.

귀농자들과 원주민들이 잘 어우러진 구례 [사진/성연재 기자]

귀농자들과 원주민들이 잘 어우러진 구례 [사진/성연재 기자]

구례 오일장에서 만난 귀농·귀촌

구례 오일장이 섰다. 전날은 셔터가 모두 내려져 있던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열었다.

일단, 그 규모가 놀라웠다. 작게는 4개 블록에 모두 장이 섰다. 주변에 상시 영업을 하는 상점들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꽤 큰 규모의 재래오일장이 열리는 셈이다.

한쪽은 수산물, 한쪽은 농산물이 자리 잡고 있고, 어느 한켠에는 귀농·귀촌자들이 스스로 문을 연 노점상도 등장했다.

전통시장 한가운데 들어선 귀농·귀촌자들의 노점은 독특한 아이템들이 팔리고 있었다. 유기농 앉은뱅이 우리 밀로 만든 피아골 자연발효 호떡을 비롯해 수제 청과 수제 쨈도 판매되고 있었다.

이들 노점상은 전통시장과 유리된 듯하지만, 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앉은뱅이 우리 밀의 경우 오히려 현지인들이 묻는 경우가 많았고, 호떡도 오히려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오일장에는 독특한 곳이 한군데 더 있었다.

구례군 농민회에선 시골집과 토지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구례군 농민회에선 시골집과 토지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한가운데 자리 잡은 구례군 농민회 상점이다. 이곳은 '귀농·귀촌인의 장터 구례댁'이라는 간판을 함께 내걸고 귀농자들의 생산품을 판매하고 있다.

가게 앞에는 시골집 토지의 임대와 매매를 무료로 소개해준다는 입간판이 서 있다. 입간판 반대쪽에는 시골집 수리 등의 문구도 쓰여 있다.

앉아있다 보니 심심찮게 귀농·귀촌인들이 들락거린다.

나뭇잎 예술가로 자신을 소개한 귀촌인 안영삼 씨는 손으로 그린 나뭇잎 조각품을 들고 왔다. 나뭇잎에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린 그는 최근 한 지역 방송을 탔다고 한다.

숱한 귀농인과 귀촌인들이 모여서 근황을 묻거나 정보교환을 하는 모습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오일장에서 좌판을 펼친 귀농·귀촌인들 [사진/성연재 기자]

오일장에서 좌판을 펼친 귀농·귀촌인들 [사진/성연재 기자]

구례군 귀농·귀촌 여건과 혜택

구례군의 인구는 해마다 줄고 있다. 해마다 유입되는 귀농·귀촌 인구가 가까스로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구례군의 사망 등 자연감소와 출생 인구의 비율은 7대 3가량이다. 빈 부분을 귀촌·귀농 인구가 채워주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구례군으로 새로 유입된 귀촌·귀농 인구는 200여명으로 2017년의 250명보다는 다소 줄었다. 피크를 이룬 것은 2016년으로, 500세대, 680명이 넘었다.

구례군 귀농·귀촌 지원센터는 귀농자와 귀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의 주거지와 농지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앞으로 크게 증가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오일장에 귀농·귀촌인들이 내놓은 수제 잼과 수제 청 [사진/성연재 기자]

오일장에 귀농·귀촌인들이 내놓은 수제 잼과 수제 청 [사진/성연재 기자]

예를 들어 거주지의 경우 초기에는 조금만 고쳐도 쓸만한 집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상당한 공사비가 들어가야 하는 집들이 많다는 것이다.

센터 이대범 사무장은 "귀촌·귀농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많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집을 구하기 힘들다"면서 "몇 개월이라도 임시로 내려와 거주하면서 알아보는 편이 확실하다"고 조언했다.

귀농·귀촌자에 대한 혜택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주택 임대·매입 또는 수리 비용을 최대 400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해 준다.

둘째, 지역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집들이 비용 50만원을 지원한다.

셋째, 농업경영체 등록 시 정착 도움을 위해 농업용 관정 개설비 지원 등 여러 혜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밖에 체류형 창업지원센터 내에 부부 기준 모두 30쌍을 대상으로 10개월간 기숙사에서 거주하며 농업 전반에 대해 배울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운이 좋은 다섯 가족은 단독주택에 머무르며 10개월간 같은 프로그램을 이수할 수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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