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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4)北에선 봉기…부르주아 민족운동 규정

송고시간2019-01-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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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성 인식하면서도 '실패' 평가…노동자·농민 중시하고 민족대표 비판

주체사관 강화하면서 러시아 혁명 비중 줄이고 김일성 가계 강조

2009년 북한이 발행한 3·1운동 90돌 기념 우표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자료사진]

2009년 북한이 발행한 3·1운동 90돌 기념 우표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독립운동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인 3·1운동은 북한에서도 그 중요성을 인식해 비중 있게 다뤄져 왔다.

북한에서는 3·1운동을 3·1봉기 혹은 3·1인민봉기라고 부른다. 인민봉기라는 용어에는 아래로부터의 집단적 움직임과 민중의 역할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3·1운동의 원인과 성격, 결과에 대한 북한 역사서의 서술은 지속해서 달라졌다.

학계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 직후인 1949년에 나온 '조선민족해방투쟁사'(김승화·최창익 등 집필)는 3·1운동을 각계각층이 연합되어 남녀노소 참가한 민중봉기로 정의하면서 운동 주체를 농민, 노동자, 학생 순으로 설명했다.

반면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선 완전히 인민을 배반했고, 소(小)부르주아 지식층의 계급적 제한성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민족대표가 3·1운동에 기여했다고 보는 남한 학계와 달리 북한에서는 지금도 민족대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항쟁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조선민족해방투쟁사'는 3·1운동이 실패한 원인으로 민족지도층이 자산계급으로서 외교적 청원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고, 군중 무장이 없었다는 점을 지목했다.

아울러 북한은 원시공동체,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순으로 역사가 발전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사관과 계급성을 바탕으로 사실(史實) 해석을 시도해 3·1운동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성격은 부르주아 민족운동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3·1운동을 부르주아 민족운동과 본격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1960년 전후에 이뤄졌다.

지난해 논문 '북한 역사학의 3·1운동 인식'을 발표한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1961년에 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를 보면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두드러진다"며 "북한에서는 1884년 갑신정변에서 시작된 부르주아 민족운동이 3·1운동을 계기로 '쇠퇴몰락'하고 민족해방투쟁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밝혔다.

이어 "1920년대 노동자 계급의 성장을 기다려 비로소 반제·반봉건 투쟁이 궤도에 오른다는 도식이 성립됐다"며 "이러한 시각으로 인해 북한에서는 1920년대 초반을 근대의 종점이자 현대의 기점으로 보는 새로운 시기 구분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3·1운동 인식에서 1960년대 이후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주체성 강화다. 1980년 무렵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지도사상으로 승격하면서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변화는 3·1운동이 발생한 원인에 대한 태도에서 확인된다. 1949년 책인 '조선민족해방투쟁사'는 망국의 설움, 쓰라린 일본통치와 함께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승리를 3·1운동 원인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주축이 돼 1982년 간행한 '조선전사'에는 3·1운동 항목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이전까지 북한이 사회주의와 연계해 주목한 1919년 3월 5일 서울 시위에서의 적기(赤旗) 등장에 관한 내용도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는 김일성 가계의 활약에 관한 서술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조선전사'는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김일성 부친인 김형직이 민족주의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했다고 평가하면서 평양을 3·1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장소로 규정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는 오후 2시 무렵 서울과 평양을 포함해 7개 도시에서 열렸고, 규모는 서울이 가장 컸다.

홍 교수는 "북한은 이전에도 3·1운동에서 평양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통사(通史) 서적 중 서울을 젖히고 평양을 앞세운 사례는 조선전사가 처음"이라며 "2011년에 나온 '조선통사'에서는 서울을 경성으로 표기해 서울이 지닌 상징성을 더 낮췄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서술은 운동의 주도권 혹은 중심성 문제를 넘어 역사의 무대에 대한 지리적 상상력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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