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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다] 김자동 "독립운동의 올바른 계승은 통일운동"

송고시간2019-01-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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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원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독립유공자 서훈 형평에 맞게 조정돼야"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서울=연합뉴스) 김은주 논설위원 = "통일된 나라, 복지의 나라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던지며 꿈꾸었던 우리의 나라입니다."

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은 "선열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조국에 이제 봄기운이 도도하다"라며 "지금은 민주공화국 100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분기점"이라고 지적했다.

1928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인근 아이런리에서 독립운동가 김의한, 정정화의 외아들로 출생한 김 회장은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자랐다. 임시정부를 몸으로 겪은 산증인이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기존의 독립유공자 서훈에는 문제가 많다"라고 말하고, "재심사를 통해 형평에 맞도록 조정돼야 하며 심사 기준도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어린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 백범 김구 선생이 기억난다. 상하이 보경리 4호가 임정 청사였고, 우리 집은 보경리 1호라 임정 청사와 대각선으로 있었다. 임정 2층 사무실을 백범이 쓰고 있었는데 우리 집이 제일 가깝고 어머니가 늘 환영하니까 점심때 자주 오셨다. 어머니가 밥을 짓는 동안 나를 데리고 산보하면서 엿을 사주셨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놀던 기억이 있다. 해방 후 1946년 자싱에 다시 가보니 임정이 있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있었다. 이후 중국이 개방되고 1980년대 말인가 1990년대 초인가 자싱에 다시 갔다. 일대가 도시계획으로 딴판이 됐는데도 어려서 살던 집은 그대로였다. 1층에 이동녕 선생, 2층에 엄항섭 선생 가족과 우리 가족이 살았다. 자싱시 정부에서 각 방에 누가 살았는지 확인해달라고 해서 알려 준 적이 있다. 지금은 방마다 명패를 달아놓았다.

-- 임시정부에 이념 갈등과 분열이 심했다는 비판이 있다.

▲ 국내, 미주, 러시아, 만주 등에서 온 분들이 모여 임정을 만들었다. 러시아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났지만, 스탈린 이전 레닌 시대였고, 비교적 자유로웠다. 러시아에서 온 사람 중에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같은 분은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러니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좌우합작으로 시작된 정부였다. 그러나 별 탈 없이 활동했다. 심지어 레닌은 임정에 지원까지 했다. 중국 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생기면서 임정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임정의 주체는 국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하시던 분들이다. 임정 초기에는 보수성향이었으나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차츰 갈라지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모신 이유는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미국통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워 러시아나 만주에서 온 사람들을 배척했다. 반면 도산 안창호는 포섭력이 있는 분이었다. 민족주의자였으나 공산주의자들과도 크게 대립하지 않았다.

-- 해방되고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되고 10개월 정도 지나서였다. 아버지는 해방되자마자 임정 선발대로 교민 보호를 위해 충칭에서 상하이로 파견됐다. 국민들은 임정을 지지하고 환영했으나 미군정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정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다.

-- 기자로 일했다.

▲ 조선일보 견습 1기로 들어가 4년을 다녔다. 중앙청, 경무대, 외무부를 출입했는데, 신문마다 기사가 똑같았다. 불러주는 대로 쓰는 기사는 재미가 없었다. 그만두고 사업을 했다.

그러다 4·19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 진보 성향의 민족일보가 설립돼 그곳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5·16쿠데타가 났다. 이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사업을 했다.

귀국해서 4·19혁명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이 내 나라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임정이 수립한 대한민국이 진짜 정부이고, 이 정부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4·19혁명이 생각을 바꿔놓았다. 나라의 정통을 지키면서 독재정권에 반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게 됐다.

-- 기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 1950년대 말 조선일보 기자 시절 얄타회담 비밀문서가 뉴욕타임스에 공개됐다. 주한미국대사관에 가서 그 날짜 뉴욕타임스를 얻어 전문을 번역했다. 다 실으려 했으나 지면 사정으로 일부만 실었다.

루스벨트는 평소에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주장해왔으나 일본인들에 속아 한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후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말은 미국에서 나온 것이다. 소련은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미국과 타협했다. 국내에서 알고 있던 것과 정반대였다. 국내에서는 미국은 우리나라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는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지지했으며, 미국은 최대한 신탁통치 기간을 짧게 하려 했는데 소련이 5년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얄타회담의 논의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그대로 반영됐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게 된 계기는.

▲ 우리 사회가 자리가 잡아가면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조상을 위한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우리도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을 위한 기념사업회를 만들자고 자녀들이 의견을 냈다.

주변에 보면 아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가 손자가 관심이 없으면 문을 닫고, 손자가 유지해도 증손이 관심 없으면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후손이 없거나, 있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워 기념사업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특정 인물 차원이 아닌, 임정 전체를 아우르는 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했다.

임정 선열들에 대한 현창 사업과 임시정부의 의미를 제대로 알리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매년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진행하고, 기관지로 월간 '독립정신'도 발행하고 있다. 처음부터 제일 중요하게 추진한 사업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사업이다.

-- 현 정부의 보훈 정책을 평가하자면.

▲ 이전 정부들과 비교해서 현 정부가 임정의 법통에 대해서 가장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대해서도 제대로 관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에는 문제가 있다. 형평에 맞지 않거나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완벽히 가짜인 경우, 후에 변절한 경우 등 문제가 많다. 서훈자 전원을 대상으로 재심사를 통해 조정해야 한다. 심사 기준도 재검토해야 하며 한번 정해진 기준은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 건국일 논란이 있다.

▲ 임정 수립일이 건국일이다. '건국절'이라는 말이 있지도 않았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새삼 단독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건국절이라는 말이 나왔다. 임정 수립일을 4월 11일로 하든 13일로 하든 중요하지 않다. 11일은 의정원이 첫 모임을 가진 날이고, 13일은 의정원 결성 후 첫 내각이 구성된 날이다. 두 날 모두 의미가 있다.

-- 올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정부와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 나는 평생을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을 품고 살았다.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좀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는 결코 분단된 나라가 아니었다. 분단이 있는 한, 광복은 미완성이다. 독립운동의 올바른 계승은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한다.

-- 어머니도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

▲ 어머니 정정화는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임정 밀사로 국내에 잠입, 독립자금을 모금해 돌아갔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아버지 김의한은 할아버지가 총재였던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에서 할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했다. 임정 선전위원이었고 애국단의 일원이었다. 한국독립당 감찰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했고,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선전과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할아버지 김가진은 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의 고문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장례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장으로 치렀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도록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고 서훈도 시행되지 않고 있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임정요인들.(독립기념관 제공)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임정요인들.(독립기념관 제공)

※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1928년 상하이에서 출생, 상하이, 자싱,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이어진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성장했고, 마지막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1949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조선일보 기자, 1961년 민족일보 기자를 지냈다. 2004년 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발족하면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고록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2014),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2018)을 펴냈고,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저),' '레닌의 회상(크루프스카야 저),' '모택동 전기(한수인 저)'를 번역했다.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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