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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32) "증언해줄 후손ㆍ친척 없으면 잊혀"

송고시간2019-02-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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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최초 현대식 병원 '제중원' 남자 간호사 김금석 선생 73년 만에 유공자 인정

1910년대 광주 제중원 직원들
1910년대 광주 제중원 직원들

[광주 기독병원 제공]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고도 역사 속에 묻혀있다가 광복 73년 만에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김금석(金今石·1891~?) 선생.

21일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전남 화순 출신인 그는 1919년 28살의 나이로 광주 최초 현대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남자 간호사로 근무했다.

제중원은 현재 광주 기독병원의 전신으로 1911년 우월순(R.W.Wilson) 선교사가 건축해 민간요법에 의존하던 광주 시민들에게 현대적 의술을 시행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기독교 등 신문물의 영향을 받은 김금석 선생 등 조선인 의료진들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분노했다.

이들은 3월 1일 서울·평양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 독립 만세운동이 광주에서도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고종(광무황제)의 국장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한 김철 선생 등이 3월 5일 광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광경과 시위 정황을 청년·지역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했고, 이 자리에 있던 참석자 모두는 광주에서도 똑같은 독립 만세운동을 하자는 데 동의했다.

이 자리엔 제중원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황상호(1890~?) 선생도 함께 있었다.

광주 제중원 모습
광주 제중원 모습

[광주 기독병원 제공]

거사 일은 당초 광주 부동교(광주 동구 불로동과 남구 사동을 잇는 다리) 아래에서 큰 장이 열리는 3월 8일로 예정됐다.

하지만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소식을 은밀하게 알리는 데 시간이 부족해 작은 장이 열리는 3월 10일로 연기했다.

거사 일에 맞춰 장터에 찾아간 김금석 선생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여든 학생·주민 등 1천여명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각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당일 오후 3시가 되자 누군가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 만세를 외쳤고,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 군중은 동시에 독립 만세를 연창하며 시장 안을 행진하기 시작했다.

양림동 쪽에서는 기독교인과 숭일학교ㆍ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고, 북문 쪽은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맡았다.

김금석 선생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등 시위에 동참했다.

시위행진은 오후 5시까지 시장에서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까지 이어졌고, 시위대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 몰랐던 일본 헌병과 경찰은 대열을 정비해 시위대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금석 선생 역시 경찰에 체포된 후 대구복심법원에 넘겨져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김금석 선생은 광복 73년이 지나도록 역사의 뒤편에 묻혀있다가 2018년이 되어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광복 후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증언해 줄 일가친척이나 후손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공적을 나타내는 기록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잊힐뻔한 그의 독립운동 사실은 다행히 경남의 한 재야사학자의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김금석 선생의 판결문 일부
김금석 선생의 판결문 일부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 제공]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은 국가기록원 등에서 독립운동 자료를 연구하던 중 김금석 선생의 '판결문'과 '수형인명부' 등을 발견했다.

그는 김금석 선생이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하고 관련 자료를 정부에 제출, 유공자 포상을 청원했다.

정 소장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로 젊어 후손이 없는 분들이 많다"며 "후손이 있다고 해도 길었던 일제 치하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얘기를 못 한 경우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김금석 선생처럼 지금까지 못 찾고 묻혀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부분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라며 "이제라도 이분들의 공적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고 민족혼을 되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독립운동가들에게 보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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