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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탄생 150주년 맞은 '임정의 수호자' 이동녕

송고시간2019-02-1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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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50주년을 맞은 독립운동가 이동녕. [연합뉴스 자료사진]

탄생 150주년을 맞은 독립운동가 이동녕.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올해로 수립 100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 한 명을 꼽으라면 과연 누구일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인가, 마지막 주석 김구인가? 아니면 건국강령 초안을 쓴 조소앙일까? 2대 대통령 박은식이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는 어떨까?

모두 임시정부의 수립과 존속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지만 26년에 걸친 임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임정에서 주석 4차례, 의정원 의장 3차례, 국무령, 국무총리를 지냈다. 학자들은 그를 '임정의 수호자', '임정의 정신적 지주', '임정의 어른' 등으로 평가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이동녕"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이동녕과 김구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 저장성 자싱시 추푸청의 집에 은신했을 때 그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왼쪽 네 번째가 이동녕, 여섯 번째가 김구. [독립기념관 제공]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이동녕과 김구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 저장성 자싱시 추푸청의 집에 은신했을 때 그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왼쪽 네 번째가 이동녕, 여섯 번째가 김구. [독립기념관 제공]

그는 1869년 2월 17일(10월 6일 출생설도 있음)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경북 의성군수를 지낸 이병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립기념관에서 2㎞밖에 안 떨어진 이곳은 이범석 생가와 이웃이고 류관순 생가와의 거리도 11㎞에 불과하다. 1982년 12월 독립기념관 터를 결정할 때도 이들 독립투사를 배출한 지역이라는 점이 고려됐다.

한학을 공부한 이동녕은 1892년 과거(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 대신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1898년 만민공동회 활동을 하다가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제국신문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의 교사로 활동하며 구국 계몽운동을 펼쳤다. 7살 아래 김구도 상동청년회에 참여해 이동녕과 첫 인연을 맺었다.

2005년 복원된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동리의 이동녕 생가. 생가 앞에 이동녕 좌상과 함께 포토존을 마련해놓았다. [석오이동녕기념관 제공]

2005년 복원된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동리의 이동녕 생가. 생가 앞에 이동녕 좌상과 함께 포토존을 마련해놓았다. [석오이동녕기념관 제공]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려다 체포돼 두 번째로 투옥됐다. 이듬해에는 북간도 룽징(龍井)으로 건너가 이상설·여준·정순만 등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해 애국지사들을 길러냈으며, 1907년 국내에서 양기탁·이승훈·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결성하고 총서기를 맡았다.

1910년 한일 강제합방이 이뤄지자 서간도로 망명해 이회영·이시영 형제들과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세웠다. 1914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등과 뜻을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1일 조소앙·안창호·신채호·김좌진·이승만·김약연·이상룡 등과 이른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국회 본청 현관에 세워진 이동녕 흉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국회 본청 현관에 세워진 이동녕 흉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1919년 3·1 독립선언을 발표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니 임시정부를 세워야 했다. 최적지로 떠오른 곳은 중국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지였다. 그해 4월 10일 밤 10시 현순의 허름한 셋집에 조소앙·신채호·이시영·신석우·여운형·신익희·이광수 등 29명이 모였다. 이날 모임을 임시의정원이라고 명명하고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이동녕과 손정도를 선출했다.

이어 밤샘 회의를 펼친 끝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것을 비롯해 민주공화제 채택, 국무총리 각부 총장 등 국무원 선출, 헌법 제정 등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뼈대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삼고 있다. 국회는 임시의정원을 계승했다는 뜻으로 1996년 서울 여의도 본청 현관에 이동녕의 흉상을 세웠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 2010년 문을 연 석오이동녕기념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 2010년 문을 연 석오이동녕기념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동녕은 4월 23일 서울에 수립된 한성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에도 추대된 데 이어 9월 국내와 중국·러시아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임정의 내무총장으로도 선임됐다. 그 뒤 임정 청사가 상하이에서 항저우·자싱·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전전하는 동안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며 망명정부의 버팀목 구실을 했다.

임정 세력이 파벌 다툼과 노선 투쟁으로 분열하자 국민대표회를 소집하고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는 등 통합에 앞장섰으나 좌절을 맛봤다. 1930년 안창호·김구·조소앙·이시영·김두봉·안공근 등과 함께 임정의 여당 격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의 이동녕 묘소와 묘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의 이동녕 묘소와 묘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이동녕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임정의 장래를 위해 김구를 앞세웠다. 1925년 김구가 국무령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임정을 강하게 이끌 사람은 백범(김구의 호)밖에 없다"며 밀어붙였다. 이동녕의 바람대로 광복 때까지 임정을 이끈 김구는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들과 함께 활동한 정화암은 "임정에서는 늘 이동녕 선생이 중심이 돼 일을 꾸몄다. 김구도 그분 앞에 가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회고했다.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도 김구가 이동녕과 상의해 벌인 일이었다.

그는 상대를 포용할 줄 아는 인품을 지녔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선비였다. 그가 좌우명처럼 여기던 고사성어 '산류천석'(山溜穿石·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이 불굴의 의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지병인 천식이 악화한 데다 급성폐렴이 겹쳐 1940년 3월 13일 치장에서 71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가 동지들에게 당부한 마지막 말은 '대동단결'(大同團結)이었다.

석오이동녕기념관에 전시된 이동녕의 친필 휘호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석오이동녕기념관에 전시된 이동녕의 친필 휘호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동녕의 유해는 1948년 8월 김구의 아들 김신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모셔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평생 동지였던 김구도 이듬해 피살돼 곁에 묻혔다. 이곳에는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와 임정 요인 차이석·조성환이 잠들어 있고,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 가묘도 꾸며져 있다. 묘역 앞에는 안중근을 제외한 7위의 영정을 봉안한 의열사가 세워졌다.

효창공원 독립운동가 묘역에 대한 예우가 국립현충원에 비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지난해 국가보훈처는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성역화하기로 했다. 그해 말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이들 묘소를 관리할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2010년 3월 1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석오 이동녕 선생 70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0년 3월 1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석오 이동녕 선생 70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동녕은 그가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에 견주면 턱없이 덜 알려졌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그동안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잘 모시지 못했다"며 이동녕의 손녀 이애희 여사를 특별히 언급했을 정도로 후손들도 어렵게 살고 있다. 기념사업회도 없어 지난해 11월에야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나라사랑국민운동본부와 이동녕선양회추진위는 이동녕 탄생 150주년과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현재 대통령장(2등급)인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훈장)을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올리자는 국민청원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고 그가 평생을 바쳐 세우고자 힘썼던 대한민국도 번듯하게 거듭나기를 간절히 빈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탄생 150주년 맞은 '임정의 수호자' 이동녕 - 9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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