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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 서울전] ①"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송고시간2019-03-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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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각성한 여성들 남녀평등·국채보상·항일투쟁에 앞장서

※ 편집자주 = 오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2관에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국립여성사전시관 특별기획전 서울전'이 개막합니다. 여성가족부, 연합뉴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여성독립운동가 공감·기억 그리고 미래'라는 주제로 마련한 전시입니다. 연합뉴스는 각종 사진과 자료 등과 더불어 전시되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 4개를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1부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에서는 구한말부터 '여권통문' 발표(1898)에 뒤이어 의병운동 참여(1896, 1905, 1907), 국채보상운동 주도(1907) 등을 통해 정치적 각성을 하면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여성들을 볼 수 있다.

여권통문을 게재한 황성신문
여권통문을 게재한 황성신문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1898년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인 이소사·김소사의 이름으로 발표한 '여학교 설시 통문'(통칭 여권통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인권 선언서로 불린다.

황성신문과 독립신문 보도에 따르면 300여 명의 여성이 참여한 여권통문은 여성의 '정치참여권'을 비롯해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경제활동 참여권',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밝힌 '평등교육권'을 담았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여성단체가 결성됐고 여성에 의한 최초의 여성학교가 들어서게 됐다. 한국 여성사의 큰 변곡점이 됐던 여권통문은 세계여성의 날이 촉발된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과 '안사람 의병가'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과 '안사람 의병가'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구한말 시아버지였던 유홍석 의병장을 따라 독립운동에 나선 윤희순(1860∼1935)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다.

그는 1895년 전국적인 항일운동인 을미의병 때 유홍석을 비롯한 가문이 의병에 가담하자 뛰어들어 여성의 항일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었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가사의 내용에서 보듯 그는 당시 가사만 전담했던 여성에게 구국운동을 일깨우고 항일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등 여성의 자각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30여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해 취사와 세탁 등 의병을 돕거나 탄약제조소를 운영했고 때론 남장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경술국치 후인 1911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선전, 독립자금 모금, 민족학교 설립 활동 등을 펼쳤고 1915년에는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 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했다.

국내서 15년 해외에서 25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일본 헌병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5년 사망했다. 우리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사진 우측)의 모친 조마리아 [국가보훈처 제공]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다. 항소하는 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나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나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초대통감을 암살해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어머니인 조마리아(1862∼1927)는 "당당히 죽으라"며 새하얀 수의를 지어 보냈다.

같은 무관 집안의 안태훈과 결혼한 그는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등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를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1907년 대구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자녀들과 함께 의연금을 납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안중근 사망 후에는 연해주로 건너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 활동을 펼쳤다.

1919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둘째와 셋째 등이 가담했고 그는 임정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포 간 갈등이나 분란 시 중재 역할을 도맡아 했다. 당시 그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 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해 '여중군자' '여걸'로 불리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국채보상운동 독려문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국채보상운동 독려문

1907년 일제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 자에 게재된 '경고 아부인동포라'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일제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나라를 넘겨야 할 위기의식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여성들은 앞장서 패물을 모았다. 그런데도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평양 숭의여고 교사 김경희와 황애시덕, 졸업생 안정석 등 3명이 여학생 20명과 함께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후에 '송죽회'로 불린 이 단체는 평양 3·1 운동을 주도했고, 회원들이 미국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국외로까지 운동이 퍼졌다.

'송죽회'는 여성 계몽운동을 펼치거나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을 지원했고 이는 여성 독립운동의 대표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송죽회를 이끌었던 김경희는 1916년 배일 혐의로 체포돼 고문 끝에 폐병을 얻었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상하이로 건너가 임정활동에 합류했다가 1920년 병사했다.

1910년대에 존재했던 다수의 비밀 결사 중에서 '송죽회'는 여교사와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송죽회에 참여한 숭의여고 학생들
송죽회에 참여한 숭의여고 학생들

숭의여고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송죽회에 가담했던 여성들.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로 극동 러시아 혁명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이가 김알렉산드라(1885∼1918)다.

그는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해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고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으로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을 건설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하바롭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한 그는 혁명을 진압하려는 백군과 맞섰으나 결국 붙잡혀 1918년 처형됐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백군 간부가 "조선인이 무슨 이유로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냐"고 묻자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고 진술했다.

그동안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이 조명을 받지 못한 탓에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에 와서야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알렉산드라와 소비에트인민위원회 표지판
김알렉산드라와 소비에트인민위원회 표지판

연해주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와 그가 일했던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인민위원회 건물 표지판 [한민족문화대백과(좌)·연합뉴스]

여성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인 김마리아(1892∼1944)다.

그는 1919년 애국부인회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하면서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는 취지문을 발표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밝혔다.

부인회는 상하이 임정에 군자금을 전달하거나 투옥된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 등에도 힘썼다. 그 일로 체포돼 옥살이한 그는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돼 활약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1928년 여성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4년 귀국 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서 오다 일제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1운동 직전에 만주지역에서는 1천335자로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됐다. 국가기록원은 이 선언서를 3·1운동 이전에 발표된 여성들의 첫 독립선언서로 평가하고 있다.

선언서는 "유정(有情)한 남자들은 각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들은 그중에 기와(起臥)하면서 무지몽매하고 신체가 허약한 여자의 일단이나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이 없이, 살아서는 독립기 아래서 활기 있는 새 국민이 되고, 죽어서는 구천하에서 수많은 선철을 찾아가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의무이므로, 동포여 빨리 분기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이 선언서는 여성 자신이 독립의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 모두 동참할 것을 권하는 일종의 격문으로 김인종, 김숙경, 김오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이 서명했다.

이처럼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자각하여 결사체를 만들고 힘을 결집한 경험은 후에 독립운동의 길에서 중요한 활동의 자양분이 되었다. 여성들은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독립 역량을 기르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농민계몽의 길에 나섰고 여권 신장과 노동운동에도 앞장섰다. 이 모든 노력은 오로지 한 곳을 향했는데 바로 대한의 독립이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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