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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할 때만큼은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송고시간2019-07-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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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경연대회 출전한 할머니 가수들

(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 = "매일 아침이 기다려지는 기분 아세요? 요즘 현관문 열고 나설 때마다 두근거렸어요. 오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예요. 나 같은 아주머니들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한영자(58)씨는 자신의 인생이 무미건조했다고 생각했다. 엄마로서 자식 넷을 낳아 30년 넘게 뒷바라지했고, 아내로서 남편의 내조도 다했건만 그런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난 2016년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한씨의 삶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오늘(25일)은 그동안 연습해 온 노래 실력을 뽐내는 날. 그냥 노래도 아닌 영어로 된 팝송을 지금껏 100번은 족히 불렀을 것이다.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만난 한씨는 "이렇게 가슴 떨렸던게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울먹거렸다.

팝송경연대회에 출전한 한영자씨와 딸 정지호씨
팝송경연대회에 출전한 한영자씨와 딸 정지호씨

[한영자씨 제공]

지난달 25일 오후 2시께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다소 특별한 노래경연대회가 열렸다. 학력인정 평생학교인 일성여자중·고등학교가 개최한 '팝송경연대회' 출전자 대부분은 환갑을 훌쩍 넘긴 할머니들. 처음에는 알파벳도 몰랐지만 이제는 팝송 가사가 한글보다 읽기 쉽다는 만학도 가수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몸이 늙었다고 마음도 같이 늙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남들 앞에서 이렇게 멋진 팝송도 부르고 있죠"

김추자(75)씨는 6·25 전쟁 당시 7살이었다. 전쟁통에 이어진 가난 탓에 먹고 사느라 학교는 꿈도 못 꿨다. 못 배운 한은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 학교 얘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었고 노년에 접어든 인생은 무미건조했다.

대회 첫 무대를 장식한 김씨는 "죽을 날만 기다리던 노인네였지만 여기 와서 달라졌다. 배우는 것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며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60년 전 소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그가 경연대회에서 부른 곡은 새드 무비(sad movies). 그가 한창때였던 1960∼1970년대 유행한 노래다.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5회 팝송경연대회 참가자들. 맨 왼쪽이 김추자씨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5회 팝송경연대회 참가자들. 맨 왼쪽이 김추자씨

[일성여중고교 제공]

"한자는 자신 있는데 영어는 영 생소한 거 있죠? 가끔 'b'랑 'd'도 헷갈리고…. 그래도 영어 가사도 다 외웠고, 제가 무대 체질이라 자신 있어요"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김송자(60)씨는 지난 4월부터 틈만 나면 경연에 나설 곡을 연습했다. 등굣길 전철 안에서, 길거리에서, 집에서 빨래와 청소를 하면서 연신 흥얼거렸다. 잠들기 전에 누워서도 불렀다. 영어가 영 익숙지 않아 가사 아래에 한글로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놓고 연습했다.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서도 그는 연신 노래를 흥얼거렸다. 10대 때엔 10번 보면 외워지던 것이 이제는 30번은 넘게 봐야 간신히 머리에 들어온다. 그래도 학교 다니면서, 팝송경연대회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하루의 의미다. 김씨는 "환갑을 갓 넘겨서 처음 깨달았다.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인생이 이만큼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왜 진작 몰랐을까' 후회도 들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며 "내년에 대학 입학도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5회 팝송경연대회 참가자들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5회 팝송경연대회 참가자들

[일성여중고교 제공]

팝송경연대회는 올해로 15회째를 맞았다. 학생들 대부분이 60∼70대인만큼,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영어 공부를 좀 더 친숙하게 하기 위해 만든 행사다. 이번에는 역대 최다 인원인 53명(15팀)이 출전했다.

만학도에게 노래는 인생의 활력소나 다름없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사는 강은순(65)씨는 2시간을 걸려 학교에 간다. 용인 성복역에서 전철을 타고 2번을 환승한 뒤 다시 시내버스로 옮겨 타고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학교로 향한다. 힘들 법도 하지만 강씨는 "그런 거 느낄 틈도 없다"고 말한다. 이동 시간은 곧 노래 연습 시간이다. 강씨는 "등하굣길 내내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그렇게 먼 길을 오가도 괜찮은 건 젊어지는 느낌 때문이다"라며 "(학교 안 가고 노래가 없었다면) 나이만 먹고 시들어 갔을지도 몰랐을 텐데…"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 최고령자인 우문숙(77)씨는 몇 년 전 암 수술을 받았다. 무릎이 안 좋아 다리 관절 수술을 받기도 했다. 아프고 우울했다. 우울함에서 그를 건져낸 것은 노래였다. 얼마 전 다녀온 봄 소풍에서 교가를 불렀는데 눈여겨보던 담임 선생님이 팝송경연대회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우씨는 "젊은 시절 즐겨 불렀던 '에델바이스'(edelweiss)를 선곡해 급우들과 도전하기로 했다"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무대 위에서 실수만 안 하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즐거운 것은 무대 위 사람들만이 아니다. 공연장 780여석을 빼곡히 채운 할머니 응원단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이나 투자해 같은 반 친구를 응원하는 현수막과 응원 도구를 만들었다는 김모씨는 "오늘만큼은 소녀다"라며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놀고 즐기겠냐"고 웃음 지었다.

회춘한 할머니들의 변화를 가족들도 반긴다. 모명숙(68)씨의 남편인 김석환(72)씨는 아내를 응원하기 위해 일을 쉬고 나왔다. 김씨는 "처음에 학교를 다닌다고 했을 때 '이 할매가 왜 이러나' 싶어 뜨악했다"며 "오늘 공연하는 모습을 보니 동의하길 잘한 거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나이 들면서 사는 즐거움이라는 게 희미해진다. 죄다 시큰둥해지지 않느냐"며 "옆에서 보기에도 아내가 다시 젊어져서 내가 다 뿌듯했다"고 말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어머니 한영자씨를 응원하러 온 정지호(21)씨는 "예전에는 엄마가 고지식하고 고집도 셌는데 학교 다닌 뒤로는 좀 달라지신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내가 엄마에게 '춤 배운다, 노래방 간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셨는데 요즘엔 일단 이해하려 하세요. 젊어진 게 옆에서 봐도 느껴져요. 배운다는 게 참 좋은 일인가 봐요. 정말"

고등부 우수상을 받은 뒤 딸 지호씨에게 꽃다발을 한 아름 받은 한씨는 "60년 가까이 살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고 말했다.

shlamaz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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