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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열사 김춘배 손자 "국민 단합해 日 경제침략에 대응해야"

송고시간2019-08-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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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전하는 조부…일본 제국에 맞선 결기와 용기 가진 분

홀로 함남 북청군 경찰 주재소 습격 총격탈취후 18일간 도피

김춘배의 검거를 다룬 동아일보 호외
김춘배의 검거를 다룬 동아일보 호외

(전주=연합뉴스) '근래 희유의 함남 권총 사건' 제하의 1934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 호외판. 김춘배의 검거 소식을 다뤘다. [네이버 라이브러리 캡처]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1934년 10월 2일 밤.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경찰 주재소에 괴한이 침입한다. 그는 홀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권총 2정(26식)과 실탄 100발, 기관총 5정(38식)과 실탄 600발, 단식 보병총 1정을 빼앗아 유유히 달아난다. 그의 이름은 김춘배(金春培, 1906∼1942). 서슬 퍼런 일제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했던 애국열사다.

광복 제74주년을 앞둔 12일 저녁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의 채움교회에서 그의 손자인 김경근(56)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 조처 등으로 악화일로로 치닫는 한일 관계에 대해 운을 뗐다.

김 목사는 "과거에는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일제의 침략에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절대 약하지 않다. 일본도 이제는 대한민국을 경쟁 상대로 보고 견제하기 때문에 이처럼 치졸한 보복을 하는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다"며 "다시는 조부가 겪었던 그 비참한 현실을 겪지 않도록 모든 국민이 단합해 일본의 경제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조부의 행적이 담긴 신문과 사료를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 목사는 조부의 생애와 항일정신에 대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1894년 전북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혁명군과 농민은 산과 들로 숨어들었다. 당시 전주부 삼례면에 살던 김춘배의 일가는 도피 대신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을 택한다. 당시 일본군은 종교를 탄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혁명군이 이러한 길을 걸었다고 한다.

정세는 이후 급변했다. 1905년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체결됐고 1910년에는 한일 강제합병이 일어났다. 김춘배의 일가가 경작하던 기름진 땅도 곧 일본인 지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김춘배와 그의 일가, 교인을 포함한 80여명은 일제의 수탈을 피해 당시의 만주로 집단 이주를 한다.

조부의 사진 보는 김경근 목사
조부의 사진 보는 김경근 목사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만주의 생활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김 목사가 수집한 신문과 사료에 따르면 김춘배는 광명학교에 다니며 기독교 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했다. 이후 북만주 독립운동 단체인 지청천 장군의 '정의부군'에 몸담고 6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6년 아내를 만나 결혼한다.

행복했던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김춘배는 결혼 생활 일 년 만에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을 추적한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제 발로 자수한다. "끝까지 찾아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생후 한 달 된 젖먹이가 아버지를 찾을 때 김춘배는 6년 4개월 형을 언도받고 영어의 몸이 된다.

탈옥으로 형량이 늘어난 것까지 포함해 8년 2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34년 5월 출소한 김춘배는 만주를 떠나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온다. 마침내 재회한 아내와 아들을 위해 수감생활 중 배운 봉제기술을 이용해 양복점에서 일한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던 김춘배의 가슴은 이내 일제를 향한 분노로 끓어올랐다.

김춘배가 출소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반도는 한 사건으로 인해 격랑에 휩싸인다. 신창주재소 무기고 탈취 사건. 단신으로 무기고를 습격한 신출귀몰한 김춘배를 붙잡기 위해 함경남도 군경 대부분이 북청군으로 집결한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김춘배를 잡기 위해 2만명을 동원하고 2만원을 썼다'는 기사가 있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은 8원이었다.

김춘배는 18일 동안 권총 두 자루에 의지하며 일제의 포위망을 뚫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 등 경관 2명에게 총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행 열차를 타고 남하하던 중 동포의 밀고로 10월 20일 신북청역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함흥지방법원은 주거침입과 절도, 강도 및 살인미수,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된 김춘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김춘배는 항소했으나 이내 취하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2년 7월 8일 옥사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일제에 저항해 싸운 김춘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부의 사진 보는 김경근 목사
조부의 사진 보는 김경근 목사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조부의 생애를 한 시간 동안 이렇게 말한 김 목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 목사는 지금이라도 조부의 행적이 정확히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당시 신문에는 신창주재소 무기고 탈취 사건 위주로만 보도됐기 때문에 현재의 완주군 삼례읍에서의 행적도 살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미 뜻있는 역사학자들이 모여 김춘배의 숭고한 항일 정신을 기리는 선양 사업을 조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김 목사는 "조부의 마지막 행적을 듣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갔는데 거기 계신 학예사분이 형무소를 거쳐 갔거나 일제가 시찰한 독립운동가가 6만명이 넘는데 그곳에는 6천여명의 기록만 있다고 했다"며 "기록이 남아있어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애국지사의 항일 운동과 그 정신을 찾아내 보존하는 일에 정부와 지자체가 이제라도 앞장섰으면 한다"고 말을 맺었다.

jay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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