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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을 통해 생각하는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

송고시간2019-08-1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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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독립운동사 연구가, '매천 황현 평전'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하고 말았구려(槿花世界已沈淪)"

경술국치 망국 소식에 초야의 선비가 땅을 치며 통곡한다. 피눈물의 '절명시(絶命詩)'는 이어진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秋燈掩卷懷千古) 세상에 글 아는 사람 구실이 어렵기도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

구한말 대표적 재야 지식인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 그는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1910년 9월 전남 구례의 거처에서 음독 자결했다. 매천의 아우 황원(黃瑗)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1944년 2월 역시 '절명시'를 유언처럼 남기고 분연히 자결한다. 친일·친독재 부역 지식인들의 뻔뻔한 삶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절개 높은 삶이자 최후였다.

매천 황현의 '절명시'
매천 황현의 '절명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친필 원본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친필 원본

독립운동사와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김삼웅 씨가 한일병합 직후 자결로써 지식인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려 한 매천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는 '매천 황현 평전'을 펴냈다.

저자는 "매천의 죽음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한 가닥 의지처가 됐고,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이 땅의 사대주의, 권력지향의 지식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며 "여전히 '여우의 탈을 쓴 식자'들이 주류가 돼 민족혼과 사회정의, 진실과 양심을 갉아 먹는 참담한 지식인 사회에 다시 한번 경종을 울리고자 이 책을 내게 됐다"고 출간 배경을 밝힌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매천은 어릴 적부터 체력이 단소하고 병약했으나 총명 강직하고 시문에도 남달리 뛰어났다. 어릴 적부터 사림(士林) 정신에 철저한 행동거지를 보인 그는 아무리 연상의 영장(靈長)이라도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1883년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해 초장(初場)에서 장원 급제했으나 한미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변경돼 발표되자 과거의 타락상에 크게 실망해 벼슬의 꿈을 버리고 낙향을 결행한다. 오직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자는 의지였다.

벗들과 부모의 간청으로 1888년 다시 상경해 과거 시험을 본 매천은 또다시 장원으로 당당히 뽑힌다. 하지만 극심한 국정의 난맥상에 거듭 절망한 나머지 "귀신같은 나라의 미친놈 족속들(鬼國狂人) 틈에 들어가 같이 미친놈이 되지 않겠다"며 단호히 벼슬길을 접기로 결심한다.

부패한 과거제도에서 장원이 되고서도 '귀국광인'들이 득실대는 조정에 출사하기를 연거푸 거부한 매천은 학문에 전념함으로써 참지식인의 순수성과 기개를 지켜나갔다. 그리고 고종 원년인 1864년부터 한일병탄의 1910년까지 무려 47년 동안의 최근세사를 직필의 편년체로 냉정하게 서술한 역사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시대를 뛰어넘어 참지식인, 참언론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지식인의 역할이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 만큼 중요하다"면서 "지식인만 제대로 깨어 있었더라면 위정자가 타락해도 국가의 쇠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시대의 지식인들은 부패하고 시대의식이 결여돼 무능한 정부를 견제하지 못했고,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다"고 안타까워한다.

매천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이 있긴 했으나 상황을 호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 물론 위정척사파 계열이던 그는 동학농민군을 '적(賊)' 또는 '비도(匪徒)', '동비(東匪)'라 부르는 등 보수적 한계도 안고 있었다.

"매천은 정말 '선비' 그 자체였다. 특별히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끝없이 관찰·기록하며 세태를 분석하고 비판해 앞길을 밝히는 등불 같은 삶이었다. 뒤편에 숨어 펜만 굴리는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라, 국난을 타개코자 하는 실천성을 가진 지식인인 것이다."

"굴곡이 심한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식인들의 타락·탈선이 수없이 많았지만, 오늘의 경우는 특히 심한 것 같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시대를 살면서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철저히 보수화됐고, 외세 추종과 권력 지향으로 체질화됐다."

김씨는 "비판을 모르는 지식인, 비판능력이 없는 지식인은 한갓 지식기술자에 불과하다. 도끼날에 향기를 묻히는 향나무 같은 존재, 매천과 같은 선비가 진짜 지식인이다"며 "매천이 그러했듯이 참지식인은 독재권력의 횡포를 비판하고 예술·문화·과학·종교 등 창조적 역할을 하는 데 백혈구 같은 역할, 바다의 염분 같은 기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김씨는 '백범 김구 평전', '안중근 평전', '독부 이승만 평전', '박정희 평전', '김대중 평전', '장일순 평전' 등 근현대사 인물평전을 잇달아 펴내고 있다.

채륜. 360쪽. 1만8천원.

매천 황현 평전
매천 황현 평전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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