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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아일랜드인 쇼가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까닭

송고시간2019-08-2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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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조지 루이스 쇼. [연합뉴스 자료사진]

독립유공자 조지 루이스 쇼.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지난 5월 3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호주 빅토리아주에 거주하는 레이철 사씨 씨의 집을 방문해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와 영문 설명판을 전달했다. 명패는 태극과 건괘(乾卦)를 훈장과 불꽃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지난해부터 후손 집에 명패를 달아주고 있다. 국외 거주 외국인 독립유공자 후손으로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유족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사씨 씨의 외증조부는 1963년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조지 루이스 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 업무와 함께 무기 운반, 군자금 전달, 독립운동가 출입국 지원 등을 맡았다. 피 처장은 사씨 씨에게 전통차를 선물하며 "쇼 선생과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다"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5월 3일 호주에 사는 조지 루이스 쇼의 외증손녀 레이철 사씨 씨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전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5월 3일 호주에 사는 조지 루이스 쇼의 외증손녀 레이철 사씨 씨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전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쇼는 1880년 1월 25일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에서 태어났다. 무역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쇼는 중국에서 성장한 뒤 1900년 한국 금광회사의 회계로 근무하다가 1907년 중국 안둥(安東)의 영국 조계지에 무역선박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했다. 지금의 단둥(丹東)인 안둥은 압록강 건너 신의주와 마주한 국경도시다. 1912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고 둘째도 일본인 아내를 맞았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입법부)을 구성해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이틀 뒤 국무원(행정부) 각료 임명을 마친 임시정부는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내무부 산하 지방 행정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공포했다. 8월에는 교통부 산하에 비밀 연락망인 교통국을 설치했다. 교통국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곳은 안둥교통지부다. 사무실은 이륭양행 2층에 두었고 10월 17일 안둥교통사무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중국 안둥에 있던 이륭양행 건물. 임시정부는 2층에 안둥교통사무국을 설치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중국 안둥에 있던 이륭양행 건물. 임시정부는 2층에 안둥교통사무국을 설치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쇼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기 전부터 독립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김구는 3·1운동 직후 동지 14명과 함께 이륭양행 배를 타고 안둥에서 상하이(上海)로 피신한 이야기를 '백범일지'에 소개했다. 김가진·김의한 부자가 1919년 10월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할 때도 쇼의 도움을 받았다.

김의한의 아내이자 임시정부 자금 조달책이던 정정화는 '장강일기'를 통해 "안둥에서 이륭양행의 배만 타면 바로 상하이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저으기 안심이 됐다"고 술회했다.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의친왕 이강도 이륭양행을 통해 망명하려 했다. 국내에서 모금한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거나 임시정부의 각종 문건을 국내에 배포할 때도 이륭양행의 신용과 네트워크를 활용했다.

일본 외무성 아세아국이 작성한 문서 '극비 쇼 사건 개요' [독립기념관 제공]

일본 외무성 아세아국이 작성한 문서 '극비 쇼 사건 개요' [독립기념관 제공]

일본은 쇼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아카이케 아쓰시(赤池濃) 경무국장은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도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며 동조했다. 일본 경찰은 아내와 아들을 마중하러 신의주로 건너온 쇼를 1920년 7월 11일 체포해 내란죄로 기소했다.

영국 정부와 국회는 거세게 항의했다. 영국 언론도 가세해 국제적으로 반일 여론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는 총독부를 설득했다. 쇼는 4개월여 만인 11월 19일 풀려나 안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해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금색공로장을 받았다.

조지 루이스 쇼의 외증손녀 레이철 사씨 씨가 보관해온 훈장과 사진 등 유품. [국가보훈처 제공]

조지 루이스 쇼의 외증손녀 레이철 사씨 씨가 보관해온 훈장과 사진 등 유품. [국가보훈처 제공]

이후로도 쇼는 선박으로 의열단원과 군수품 등을 실어나르는가 하면 임시정부에 권총을 구해주기도 했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쇼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고 위험할 때는 안둥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하자 쇼의 지원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국경지대 단속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이륭양행 선박을 불법 조사하고 어용 선박회사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어 곤경에 빠뜨렸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군부까지 나서 이륭양행의 영업을 방해하자 쇼는 압록강 항로권과 선박을 팔고 고향인 푸저우로 1938년 4월 옮겨갔다.

쇼는 푸저우에서 석유 판매 등의 사업을 벌였으나 그곳에서도 일제의 핍박을 받다가 1943년 11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서훈을 결정했으나 유족을 찾지 못해 훈장을 보관해오다가 49년이 지난 2012년 8월 손녀 마조리 허칭스 씨에게 전달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오른쪽)이 2012년 8월 16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조지 루이스 쇼의 손녀 마조리 허칭스 씨에게 건국공로훈장증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오른쪽)이 2012년 8월 16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조지 루이스 쇼의 손녀 마조리 허칭스 씨에게 건국공로훈장증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자신에게도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아내와 며느리까지 일본인인 쇼가 신변과 사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까닭은 무엇일까? 일제의 방해로 막대한 경영 피해를 보는 바람에 반일 성향을 지니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그가 아일랜드계여서 한국에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더 실린다.

12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는 1916년 부활절 봉기를 계기로 독립을 선언했으며, 1919년 1월 21일 독립전쟁을 시작해 1921년 12월 6일 독립을 쟁취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쪽 끝에서 한국과 아일랜드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섬나라 제국들을 상대로 동시에 독립투쟁을 펼친 것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31일자 2면에 실린 만평 '애란(愛蘭)과 영(英) 수상(首相)'.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을 지지하는 논조가 잘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31일자 2면에 실린 만평 '애란(愛蘭)과 영(英) 수상(首相)'.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을 지지하는 논조가 잘 드러나 있다.

쇼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이륭양행 직원 김문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소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인 바 다수의 한국인 지기들로부터 그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를 받았을 때는 적당한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행동이 동병상련을 넘어서 인도주의의 발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쇼가 태어난 푸저우 생가는 공원으로 바뀌었고, 그가 묻힌 푸저우의 외국인 공동묘지도 문화혁명 때 파헤쳐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안둥의 이륭양행 자리에도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쇼가 영국인으로 기재돼 있다는 사실이다. 아일랜드인이 이를 본다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의 국적이 일본인으로 적힌 것을 보는 심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아일랜드인 쇼가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까닭 - 8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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