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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세상] "가난은 인간을 낡게 한다"…편의점주가 화제 글에 담은 뜻은

송고시간2019-10-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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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민호 인턴기자 = "가난을 극복하려면 무언가는 '타고 나' 있어야 합니다. 조금은 머리가 영민하다거나, 긍정적인 성격이라거나. 그러나 가난은 이 모든 것을 아주 빠르게 풍화시킬 수 있습니다. 게다가 풍화의 속도만큼이나 우리는 빠르게 나이를 먹지요. 모든 노력이 무용해지는 나이가 금세 찾아옵니다."

지난달 13일 e스포츠에 관한 온라인 커뮤니티 'pgr21'에 '자영업자가 바라본 가난요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가난의 모습과 원인, 대안 등을 논한 글은 삽시간에 다른 커뮤니티로 퍼지며 은은한 파장을 일으켰다.

'밥오***'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글쓴이는 자신이 편의점을 운영한다고 밝히며 "허구한 날 지각을 하거나 도박사이트에 돈을 걸어 월급을 탕진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보면 가난이 그들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의점
편의점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연합뉴스TV 제공]

그는 "그러나 그런 모습은 가난의 원인이 아니라 일정 부분 가난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글쓴이는 "빈곤층의 몸과 정신은 가난에 어느 정도 '낡아'진 상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멀쩡한 몸과 정신마저 낡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난의 무서움"이라고 적었다.

그는 가난이 육체와 정신의 건강함을 부식하는 과정에 대해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인스턴트나 저가의 음식으로 식사를 해도 몸에 탈이 없고 하루 8∼9시간의 노동을 건강한 마음 상태로 수행한다는 것"이라며 "과연 이러한 생활 속에서 누가 건강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힘들게 잡은 저임금 일자리마저 (육체노동 등으로) 사람을 빠른 속도로 마모시킨다"고 했다.

그는 "고작 편의점도 직원을 채용할 때 다른 편의점에서 일한 이력을 채용 기준으로 삼는다. 가난 때문에 여러 가지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하다 별다른 전문성을 쌓지 못한 사람은 저임금 시장에서조차 빠르게 도태된다"며 "가난이 가난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지적했다.

악순환의 결과로 "40대에 들어서도 변변찮은 기술도 이력도 없다면 정말로 '법이 보호하지 않는' 일자리조차 감지덕지하게 된다"면서 "그 상황에서 지엄한 법은 종이 쪼가리만도 못하게 되고 질병이나 작은 사고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몸과 정신이 멀쩡한데 가난하다는 말은 틀렸다. 가난하면 몸과 정신이 멀쩡할 수 없다"고 사회적 통념을 비판했다.

글쓴이는 소위 '노오력'을 강조하는 세태에 대해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이미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은 도시의 변두리로 숨어 소리도, 냄새도 지워진다"고 에둘러 비판했다. 그는 "그러나 지워져 가는 곳에도 사람이 있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이 글은 여러 SNS에 공유되며 화제를 모았다. 트위터 이용자 'ryu****'는 글을 전하면서 "문단마다 숨이 턱턱 막히게 공감 가는 글"이라고 평가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뽐뿌' 이용자 '그**'는 "준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찾아오지만 실상 준비할 수 있는 것조차 혜택"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작성자의 글 일부와 글이 공유되는 모습
작성자의 글 일부와 글이 공유되는 모습

[prg21 홈페이지 캡처(왼쪽), 트위터 캡처(오른쪽)]

글을 쓴 박진웅씨는 IT업계에 종사하는 30대 회사원으로 가족과 함께 부업으로 편의점을 운영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3일 연합뉴스 서면 인터뷰에서 '부모의 몸과 정신이 멀쩡하다면 자식이 가난에 허덕일 이유가 없다'는 글을 보고 반발감에 글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악한 글이 이 정도로 많이 읽혀도 되는지 모르겠다. 얼떨떨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그는 "가난은 구체적인 것"이라며 "남들이 헬스장에 다니며 개인 트레이닝을 받을 때 동네 공원을 뛰고, 운동화가 닳아서 자세가 흐트러져도 쉽게 새 신발을 사지 않는 게 가난의 모습이고 과거의 저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가난이 삶을 갉아먹는다는 표현이 다수의 공감을 산 데 대해 "학창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만나본 것과 열 가지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직종의 사람을 만난 경험이 녹아들어서인 것 같다"고 짐작했다.

박씨는 "불평등이 심화한 상황에서 공정은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며 "공정한 경쟁이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경쟁을 통해 얻은 결과의 격차를 줄이는 등 평등의 수준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항섭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사람들은 불평등한 현실에 편입해 그 안에서 아귀다툼을 하게 된다. 결국에는 사회 규범도, 공정이라는 가치도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며 개인의 능력이나 나태에만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빈곤과 불평등의 구조를 주목해야 한다는 박씨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nowher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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