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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액티브] 휠체어 타고 고궁에 가봤더니…곳곳에 '산과 절벽'

송고시간2019-11-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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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 종로구 휠체어 탑승 취재기

(서울=연합뉴스) 김민호 전송화 주보배 인턴기자 =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중)

고궁, 박물관을 찾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일 등 누군가에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 다른 이에게는 험난하기 그지없는 여정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의 문화생활을 취재하기 위해 휠체어에 몸을 실어보고서야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조금이나마 문화생활에 접근하려면 도처에 도사린 각종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장애를 무의미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진 비영리단체 '무의'의 이영지 활동가와 함께 지난달 15일부터 2주일간 정독도서관, 창덕궁 등 종로구 일대에서 휠체어를 이용한 취재를 진행했다.

입구에 경사로가 없는 전시관(사진 왼쪽)과 경사로가 설치된 전시관(오른쪽)
입구에 경사로가 없는 전시관(사진 왼쪽)과 경사로가 설치된 전시관(오른쪽)

[촬영 전송화]

◇ 돈의문 박물관, 경사로 없는 전시관 과반…"휠체어 이용자에 관람은 사치"

지난달 15일 휠체어를 탄 채 방문한 종로구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는 장애인용 승강기가 있었고, 휠체어도 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시관 입구에 경사로 대신 계단이나 높은 턱이 설치된 곳이 많아 휠체어를 타고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은 몇 곳에 지나지 않았다.

박물관 안내소와 편의시설을 포함해 마을에 있는 40개 전시관 중 휠체어 진입이 용이한 곳은 14곳뿐이었다. 4개 전시관은 장애인용 승강기를 통해 진입할 수 있었으며 10개 전시관은 입구가 평평하거나 완만한 고정식 경사로가 있었다.

나머지 26개 전시관은 입구에 계단이나 높은 턱이 있어서 진입하기 어려웠다. 휠체어를 통째로 들어서 안으로 옮겨주지 않는 이상 관람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들 전시관은 들어가지 못한 채 휠체어에 앉아 사람들이 북적이는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 했다.

그러던 중 박물관 마을에 어울리는 예술가 작품을 전시해놓은 '작가 갤러리'로 향하는 길목이 완만한 경사로로 이뤄진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갤러리 입구까지 갔다.

하지만 막상 문 앞에 다다르니 턱이 나타나 아무리 바퀴를 굴려도 혼자 힘으로는 넘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전시를 구경하지 못하고 휠체어를 돌려야 했다.

평소에는 전혀 방해되지 않던 계단과 턱이 휠체어를 이용할 때에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박물관 안내소는 방문객이 요청하면 이동식 경사로를 설치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이를 안내하는 홍보물은 없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관계자는 "마을에는 1m짜리 2개와 2m짜리 1개 등 총 3개의 이동식 경사로가 갖춰져 있지만 홍보 부족으로 이용률이 저조하다"며 "안내소에 홍보물을 부착하고 휠체어를 타고 방문한 이용객에게 적극적으로 서비스를 안내하는 등 이동식 경사로 서비스 홍보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전시관 내부에도 턱이 있는 모습
전시관 내부에도 턱이 있는 모습

[무의 제공]

◇ "화장실 찾아 삼만리"…장애인이 찾지 않는 정독도서관

"정독도서관은 장애인이 이용하기 어렵다고 들어서 가본 적 없어요"

휠체어 이용자 추경진(52)씨는 "평소에 시간 나는 대로 문화생활을 즐기지만 정독도서관은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서울교육청 정독도서관이 올해로 44살을 맞았지만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여전히 미비하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22일 직접 휠체어를 타고 다녀본 정독도서관은 추씨 말처럼 장애인 혼자서는 이동하는 것을 물론 책을 읽기도, 화장실을 가기도 힘들었다.

도서관 내 장애인 화장실이 4개 있었지만 휠체어를 탄 채 이용할 수 있는 곳은 1동 외부에 있는 다목적 화장실뿐이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다가 화장실을 쓰려면 힘들게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찾아가기도 어려웠다.

다른 장애인 화장실 중에서는 구조적으로 휠체어 이용자가 사용할 수 없는 곳도 있었다. 1동 3층 여자 장애인 화장실은 휠체어가 들어가면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공간이 작았다. 휠체어 이용자가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바깥에 휠체어를 둔 채 목발, 보호자 등에 의지하거나 혼자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 실정이다.

3동에는 여자 화장실에만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돼 있지만 이마저도 변기 레버가 작동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정독도서관 화장실 공간이 좁아 문이 닫히지 않는 모습
정독도서관 화장실 공간이 좁아 문이 닫히지 않는 모습

[촬영 주보배]

도서관 다른 시설도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2동 자료실에는 책장이 빼곡하게 배치돼 있어 휠체어를 타고 지나갈 때 계속 팔이 책장에 부딪혔다. 책장 사이가 너무 좁아 휠체어를 돌릴 수도, 옆으로 나갈 수도 없어 결국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후진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야 했다. 이동 중 책장 밖으로 튀어나온 책들이 휠체어를 움직이는 팔을 긁기도 했다.

2동에서 3동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차도만 있을 뿐,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경사로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언제 차가 다가올지 몰라 위험해 보였고 가파른 차도를 이용하는 휠체어 이용자가 잠시 손을 놓으면 언덕 아래로 구를 위험성도 있었다.

가까스로 찾아간 3동은 2층부터 열람실이 있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휠체어를 탄 채 험한 길을 올라왔지만 결국 열람실을 이용하지 못했다.

정독도서관 시설과 관계자는 "건물이 오래되다 보니 장애인들이 이용할 때 불편을 느꼈을 수 있다"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확인될 때마다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접 오기 불편한 분을 위해 무료 책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방문 시 불편한 점이 있다면 관계자에게 문의해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창덕궁 인정전 통로 경사로(왼쪽)와 경사로를 오르다 균형을 잃은 모습(오른쪽)
창덕궁 인정전 통로 경사로(왼쪽)와 경사로를 오르다 균형을 잃은 모습(오른쪽)

[촬영 김민호, 주보배]

◇ 유명무실한 창덕궁 경사로…"장애인에겐 절벽"

같은 날 오후 도보로 10여분 거리인 창덕궁으로 향했다.

휠체어를 탄 채 성인 한명이 넉넉히 지나갈 정도의 통로를 통해 궁에 입장했다. 바퀴를 움켜쥔 손이 통로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을 편 채 바퀴를 조심스럽게 밀어야 했다.

궁금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 시선을 뒤로 한 채 휠체어를 밀고 나가자 나타난 계단 옆에 나무로 된 경사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경사로 초입에 올라서려는 순간 휠체어 앞바퀴가 들렸다. 휠체어가 기울어지며 뒤로 쓰러질 뻔한 순간 뒤에 있던 동료가 휠체어를 잡아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대조전, 구 선전원, 선정전 일원을 제외한 대부분 시설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었지만 부실한 앞부분 마감 처리로 생긴 턱이 오히려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을 방해했다.

바닥과 경사로 초입의 높이를 맞춰 연결하거나 흙으로 마감 부분을 덮는 식으로 잘 처리된 곳도 있어 창덕궁이 장애인 관람을 도울 방법을 알면서도 제대로 조처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마감 처리가 잘 된 창덕궁 경사로 모습
마감 처리가 잘 된 창덕궁 경사로 모습

[촬영 김민호]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개선 방법은 모두 알고 있지만 주관 부처가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며 "장애인에겐 조그마한 것도 절벽처럼 다가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비장애인은 불편함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공공문화시설에 장애인의 접근이 어려운 것은 차별"이라며 "공공 문화 시설 관계자가 직접 휠체어를 타고 이용해보는 등 장애인 입장에서 시설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장애인문화협회 신동일 회장은 "턱을 메우고, 경사로를 설치하는 등 문화시설에 대한 접근성을 키우는 것은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노인, 유모차를 끌고 나온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공 문화 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창덕궁 관리소 측은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확인 결과 전체적으로 경사로를 지면과 밀착하도록 사선 절단했으나 미흡하게 처리된 곳이 일부 있었다"며 "지면과 밀착된 부분을 고무 또는 철 재질의 휠체어 진입판 등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더불어 경사로 위치를 안내할 수 있는 리플렛을 제작하기 위해 업체와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nowhere@yna.co.kr, sending@yna.co.kr, jootreasur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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