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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법의학자가 말하는 9·11, 다이애나빈 음모론

송고시간2019-11-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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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셰퍼드 - 죽은자들의 의사' 출간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요즘 들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부각되는 빈도가 많이 늘어난 직업으로는 단연 법의학자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다루는 일이 그만큼 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영국의 대표적인 법의학자 리처드 셰퍼드 박사의 베스트셀러 '닥터 셰퍼드 - 죽은 자들의 의사(원제 Unnatural Causes)' 역시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극적인 법의학의 세계를 실감 나게 묘사한다.

영국의 유명한 법의학자가 쓴 책을 읽고 그 직업에 매료돼 길고 긴 수련 기간을 거쳐 꿈에 그리던 법의관이 된 저자는 30여년간 2만 구 이상의 시신을 부검했고 영국에서 벌어진 주요 사건은 물론 9·11 테러(미국)와 발리 폭탄 테러(인도네시아),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사망 사고(프랑스) 등 세계 곳곳의 사건, 사고 조사에도 참여했다.

저자가 처음 다룬 주요 사건은 1987년 잉글랜드 남부 버크셔 카운티의 작은 마을 헝거포드에서 일어난 총기 학살이었다. 마이클 로버트 라이언이라는 27세 청년이 소총과 권총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해 16명을 살해하고 15명을 부상케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대규모 총기 살상이 흔치 않았던 영국을 경악에 빠트렸다.

현장에 출동한 그는 도처에 널린 다른 시신들의 사인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나중에 부검을 통해 밝히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은 학교 교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범인의 사인이었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관통한 총알이 반대쪽 관자놀이로 빠져나와 교실의 알림판에 박힌 것으로 봐서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보였다. 다음날 라이언과 숨진 피해자들의 부검을 깔끔히 진행함으로써 이 사건은 그에게 법의학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해 주었지만 평생 남게 될 트라우마도 함께 안겼다.

9·11 테러
9·11 테러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들이 탄 항공기에 부딪혀 불타는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 센터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도 저자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국인 사망자를 분류하고 시신을 송환하기 위해 뉴욕으로 급파된 그는 이미 베테랑급 법의학자였는데도 흔적을 알 수 없게 훼손된 시신을 보는 일이 충격이었다. 시신을 보관하기 위해 마련된 트레일러에 실려 온 사망자는 2천753구나 됐고 시신 조각은 모두 7만 개에 달했다. 그와 같이 일한 한 인류학자는 그 후 비행기에 탈 때마다 팔다리에 자기 이름을 써놓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비행기가 추락해 팔다리가 절단될 경우에 대비해서다.

당시 뉴욕의 시신 분류 작업 현장에서 만난 영국 정치인이 숨진 영국인들의 시신을 영국 국기로 감싼 관에 실은 뒤 공항에서 군인들의 호위 아래 비행기에 옮겨 싣자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이 와중에 '홍보 효과'만을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화가 자신도 모르게 "관이라고요? 이 사람들은 대부분 가루가 됐습니다. 모르겠어요? 관이 아니라 성냥갑에 넣어서 보내야 할 정도라고요"라고 소리쳤다.

저자는 다이애나 빈 사망 사고를 둘러싼 음모론도 언급했다.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다이애나 빈이 탄 차가 파파라치를 피해 과속으로 질주하다 지하도로 교각을 들이받으면서 다이애나 빈을 포함한 3명이 사망한 사건은 교통사고로 결론이 난 뒤에도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됐다. 영국 정부는 마침내 2004년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결정했고 저자는 1997년 작성된 기록을 재검토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저자는 조사를 통해 다이애나 빈이 사고 직후 의식이 있었고 당시 의료진이 정맥 출혈을 너무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살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이애나 빈은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으나 앞자리에 탄 경호원이 에어백 역할을 해준 덕에 겉보기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폐정맥이 찢어져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두가 경호원을 살리기 위해 매달려 있는 동안 다이애나 빈의 정맥에서 나온 피는 천천히 흉곽으로 스며들었고 그는 마침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의료진이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출혈을 일으킨 부위는 가슴 중심 깊은 곳에 있어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음모'로 연결 지을 수는 없다. 항간에 떠돌던 다이애나 빈의 임신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없었다. 저자는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그 차에 승차한 사람 중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음모는 없었다. 그것은 비극적인 사고였다"고 명쾌히 정리했다.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우리나라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지만 영국에서도 법의학자의 삶은 고달프고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은 별로 없는 듯하다. 오히려 사건 피해자나 가해자 어느 쪽으로부터든 원망을 들을 가능성이 더 높다. 1989년 템스강에서 모래채취선이 소형 유람선을 들이받아 51명이 숨진 사고와 관련해 저자는 뜻밖의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한여름 시신이 빠르게 부패하는 상황에서 사망자들의 신원을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야 했던 저자는 사고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문 감식 시설에 냉장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하다 결국 관계자들과 협의를 거쳐 신원 확인이 안 된 시신 17구의 손목을 절단해 보내기로 한다. 지문 감식을 마친 후 다시 손목을 봉합해 장례를 치르면 될 일이었고 그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돌아온 손목이 제대로 봉합되지 않은 채 시신이 입관됐고 이것을 감추기 위해 장의사들은 누군지도 불분명한 '상부' 지시로 유족에게 시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은 채 관을 봉인했다는 기사가 3년이 지나서 언론에 보도됐다. 유족들 분노가 폭발했고 모든 원망이 법의관이었던 저자에게로 향했다. 기자들이 밤낮없이 찾아왔다. 동료들조차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외면하는 상황에서 저자는 몇 년간 홀로 비난을 뒤집어써야 했다.

매일같이 비명횡사한 시신과 울부짖는 유가족을 대하는 것은 아무리 직업이라고 해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뜻하지 않은 비난과 원망까지 안게 된다면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저자는 2016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어느 특정 사건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30년 동안 감정을 꾹꾹 억눌러온 결과였다.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는 저자는 휴직해 정신적 안정을 되찾은 뒤에야 복직해 다시 부검용 메스를 손에 들 수 있었다. 휴직 기간에 그가 치료를 위해 한 일은 상담과 약물치료, 그리고 이 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일간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사회를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진영 옮김. 갈라파고스. 464쪽. 1만8천500원.

영국 법의학자가 말하는 9·11, 다이애나빈 음모론 - 3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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