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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 조병창] ① 해방 이후 처음 공개된 일제 강제동원의 현장

송고시간2019-12-09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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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1만명 노동 착취한 일제 무기공장…국내 최초로 현장 취재

공장 옆 철길은 민족경제 수탈의 증거…평양도 관할하던 본부 새로 확인

해방 후 첫 공개…강제동원 피해상징 '일본육군 조병창' / 연합뉴스 (Yonha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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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6-lMFQx0bU

[※편집자 주 = 인천 시내 한복판 부평미군기지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적 현장인 '일본육군 조병창' 유적이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일본육군 조병창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금속품으로 무기를 만들던 무기 제작 공장입니다. 그러나 일본육군 조병창이 해방 이후 미군기지에 편입되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돼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전문가들의 체계적인 연구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판결 이후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일관계가 급랭 국면에 빠진 가운데 일본육군 조병창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연합뉴스는 임시정부 수립 100년,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마무리하며 한반도 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증거인 일본육군 조병창 유적 내부를 국내 언론 최초로 취재했습니다. 일본육군 조병창 유적의 현재 모습, 과거 조병창에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의 목소리, 조병창 유적의 보존 필요성 등을 3일간 송고합니다.]

일본육군 조병창, 일본강점기 모습 그대로 존재
일본육군 조병창, 일본강점기 모습 그대로 존재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에 일본육군 조병창 공장 3개 동(오른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왼쪽 사진은 일본육군 조병창 건물 3개 동의 1946년 당시 모습. 일본육군 조병창은 일본군이 중국 침공을 위해 1939년 만들어 조선인 1만여명을 강제동원했던 무기 제조공장이다. 2019.12.9 [인천 부평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홍현기 기자 = 1945년 해방 이후 70년 넘게 베일에 싸여 있던 일본육군 조병창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1만여명을 강제동원하며 우리 민족경제를 수탈한 증거를 마침내 드러냈다.

일본육군 조병창은 일제가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놋그릇·놋수저·징·범종 등 금속품을 용광로에 녹여 무기를 만들던 주물공장으로, 1930년대 말 가동 초기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연합뉴스는 9일 2개월이 넘는 설득과 협의 끝에 국내 언론 최초로 주한미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일제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 당시 국내 최대 무기공장이었던 '일본육군 조병창' 내부를 취재했다.

외관 그대로 간직한 일본육군 조병창 공장 3개 동
외관 그대로 간직한 일본육군 조병창 공장 3개 동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에 일본육군 조병창 공장 3개 동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육군 조병창은 일본군이 중국 침공을 위해 1939년 만들어 조선인 1만여명을 강제동원했던 무기 제조공장이다. 2019.12.9

일제는 1939년 지금의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부지 안에 조병창을 건립하면서 주물공장 등 3동의 공장시설을 건립했다. 1946년 해방 직후 촬영한 조병창 전경 사진과 지금의 모습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곳이 일본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1만여명이 배고픔과 감시 속에 일본군이 사용할 총·칼·탄환 등을 만들며 노동을 착취당하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주한미군이 창고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 공장건물 외벽에는 커다란 굴뚝 2개가 우뚝 솟아 있어 일제강점기 때 수탈한 금속 생활용품을 녹이던 주물공장 유적이라는 사실을 방증했다.

일본육군 조병창 주물공장에 우뚝 솟은 굴뚝
일본육군 조병창 주물공장에 우뚝 솟은 굴뚝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 일본육군 조병창 주물공장 외벽에 굴뚝 2개가 우뚝 솟아 있다. 굴뚝과 공장건물이 연결된 지점은 불을 피워 난 연기가 오가는 '연도(煙道)'다. 일본육군 조병창은 일본군이 중국 침공을 위해 1939년 만들어 조선인 1만여명을 강제동원했던 무기 제조공장이다. 2019.12.9

건물 안에도 옛 주물공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주물공장 건물 내부에는 육각형 모양의 주물화로 흔적은 물론 물론 외부 2개의 굴뚝과 연결하는 6개의 연기통로(연도·煙道)도 확인됐다.

동행한 전문가들은 바로 이곳에서 일본군이 한반도 전국 각지와 중국 대륙에서 공출한 쇠붙이를 용광로에 녹여 무기 제조의 부품을 만드는 작업을 했던 곳이라고 풀이했다.

일본육군 조병창 주물공장 내부 화로의 흔적
일본육군 조병창 주물공장 내부 화로의 흔적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 일본육군 조병창 공장 내부 벽에 육각형 모양으로 주물화로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육군 조병창은 일본군이 중국 진출을 위해 1939년 만들어 조선인 1만여명을 동원했던 무기 제조공장이다. 2019.12.9

일본육군 조병창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구술 내용을 정리해 발표했던 이상의 인천대 초빙교수는 "이들 3개 건물이 조병창 제1제조소 '1공장'에 속한 건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조병창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는 쇠붙이를 녹이거나 목재를 쪄 무기 부품 등을 만들던 '1공장', 이를 제련하는 2공장, 부품을 조립해 완성품을 만들던 3공장으로 나뉘어 운영했다.

이상의 교수는 "1공장에서는 쌓여있던 철제 강판을 정리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갑자기 강판이 떨어져 팔이 절단되는 사례도 있었다"며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참했던 환경을 전했다.

주물공장 바로 옆에는 일제가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쇠붙이나 금속품을 옮겨오고 조병창 공장에서 만든 무기를 아시아 곳곳 전쟁터로 공급하는데 사용한 철길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인천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북쪽의 끊어진 철길
인천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북쪽의 끊어진 철길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자 '캠프마켓' 북쪽지역에 설치된 철길이 끊어져 있다. 이 철길은 일본군이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금속품을 옮기거나 공장에서 만든 무기를 전장으로 옮기는 데 사용한 것이다. 2019.12.9

일본육군 조병창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생존자들은 "일제강점기 조병창 철길 주변에는 일본군이 전국에서 수탈해온 갖가지 쇠붙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배성수 인천도시역사박물관장도 "일본군은 한반도 전역에 철길을 만들고 각지에서 싣고 온 공출품을 조병창으로 집결시켰다"면서 "조병창 철길 바로 옆 공장에서는 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철길 근처에서는 과거 일본군이 조병창의 출입문을 달기 위해 세운 문설주로 보이는 기둥 2개가 확인되기도 했다.

과거 조병창 문설주 추정 기둥 2개
과거 조병창 문설주 추정 기둥 2개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북쪽지역에 돌기둥 2개가 우뚝 서 있다. 이들 기둥은 출입문을 달기 위해 세운 '문설주'로 추정됐다. 2019.12.9

특히 일본육군의 조병창 본부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이 실제 확인 결과, 본부 건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병원 건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확인됐다.

조병창 본부는 한반도 내 일본육군의 군수공장인 인천육군 조병창 제1제조소(인천 부평), 제2제조소(북한 평양)를 관할하던 곳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1948년 촬영한 아래 사진에 보이는 흰색 건물이 조병창 본부로 알려졌다.

주한미군은 일본육군 조병창 본부를 막사·클럽·PX 등으로 활용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맥아더 장군이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전쟁 당시 본부 건물이 폭격을 맞아 중앙 부분이 파손되면서 주한미군이 조병창 본부 건물을 2개로 나눠 사용해 왔다는 의견이 그동안 대세를 이뤘다.

한국전쟁 때 폭격 맞은 조병창 건물
한국전쟁 때 폭격 맞은 조병창 건물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에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2개 동으로 갈라진 건물(아래쪽)이 서 있다. 위쪽 사진은 1948년 당시 이 건물의 모습. 이 건물은 조병창 본부 건물로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병원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빨간 점선은 폭격으로 사라진 건물 부분. 2019.12.9 [주한미군 출신 노르브 파예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연합뉴스 취재진과 함께 조병창 본부 건물 내부로 들어간 전문가들은 둘러본 결과, 일제가 본부로 사용하지 않고 병원 등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일본육군 조병창 병원 서무과에서 일했던 지영례 할머니가 소장하고 있던 병원 사진과 이 건물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따라서 조병창 본부 건물은 캠프마켓 관리인 사무실이자 소방서로 썼던 건물 또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맞은편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 대체로 공감대를 이뤘다.

이들은 캠프마켓 관리인 사무실 건물 정문 앞까지 둥근 형태의 의전용 차량 통행로가 갖춰진 모습을 보면 일본 군부대 본부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과 일치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 이 건물의 기와에 일본 육군의 상징인 별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도 이곳이 본부 건물일 가능성을 높이는 근거 중 하나라고 이들은 덧붙였다.

'일본 상징' 별 문양 새겨진 기와
'일본 상징' 별 문양 새겨진 기와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 조병창 본부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은 건물의 기와에 일본 육군을 상징하는 '별' 문양이 새겨져 있다. 2019.12.9

이 건물 옆에는 일본육군 조병창 장교 숙소나 음식점 등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남아 있었다. 또 인근에는 일본 석등도 있었다. 건물 앞에 있는 게시판도 일제강점기 때 것을 미군이 그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캠프마켓'에 남아 있는 일본 석등
'캠프마켓'에 남아 있는 일본 석등

(인천=연합뉴스) 윤태현 기자 = 지난 4일 오후 인천시 부평구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내에 일본 석등(石燈)이 남아 있다. 2019.12.9

이연경 인천대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기존에 본부로 알려진 건물은 병원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곳 외에도 캠프마켓 내에 있는 조병창 유적의 과거 용도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 사료 확보와 내부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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