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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12·12 처음부터 쿠데타 인식…韓 '남침 우려'로 美 설득"

송고시간2019-12-1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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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美·英 대사관 외교문서 공개…"美대사, 10·26 처음엔 쿠데타로 생각"

"美, 12·12 후 한국대사 불러 압박…국무부 성명 수위 낮추기도"

정부, 美전달 문건서 '1980년 北의 남침 첩보' 부각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임주영 특파원 = 1979년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 때 한국에 주재한 미국과 영국 대사관의 긴박한 움직임과 상황 판단을 엿볼 외교문서가 12일(현지시간) 공개됐다.

한미클럽은 10·26과 12·12 40년을 맞아 미국 존스 홉킨스대 제임스 퍼슨 교수와 함께 당시 급박한 상황을 기록한 양국의 외교문서 500여쪽을 공개했다. 또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한국학프로그램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은 이날 워싱턴에서 관련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들 문서에는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와 이어진 전두환 등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등 급박했던 시기에 한국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미국과 영국 대사관의 움직임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미국이 12·12를 초기부터 사실상 쿠데타로 규정한 사실, 주미 한국대사를 불러 신군부에 압력을 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 첩보를 부각하는 등 신군부가 남북 대치 상황을 이용해 미국을 설득하려 한 정황도 있다.

주한 미국, 영국 대사관이 보낸 10·26와 12·12 관련 외교 전문
주한 미국, 영국 대사관이 보낸 10·26와 12·12 관련 외교 전문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한미클럽은 12일(현지시간)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 40년을 맞아 미국 존스 홉킨스대 제임스 퍼슨 교수와 함께 당시 급박한 상황을 기록한 한국 주재 미국 및 영국 대사관의 외교문서 500여쪽을 공개했다. 2019.12.12 jbryoo@yna.co.kr

◇ 美대사, 10·26 때 처음엔 쿠데타로 인식 = 1979년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한 10·26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처음에 군사 쿠데타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한 영국 대사관은 1979년 10월 29일 영국 대사가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미국대사와 나눈 대화를 본국에 전문으로 보냈다.

이 전문에 따르면 글라이스틴 대사는 27일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군사 쿠데타가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이 소식을 전한 이가 한국군 메신저여서 이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군을 포함한 외부 세력과 모의했다는 증거가 없어 29일 시점에는 측근에 의한 일종의 궁정혁명(palace revolution) 쪽으로 정리했다.

그러면서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과 심복인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제거하면 군과 민간 양쪽의 거물이 그를 위해 모여들 것을 기대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영국 대사에게 북한에서 놀랄 만한 군사 행동이 관측되지 않았고, 북한은 남한의 비상대기상태에 대응해 천천히 반응을 늘리는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두 대의 공중조기경보관제기(AWACS)와 항공기동부대가 한반도에 배치된다는 사실도 알렸다고 한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비극의 현장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안방에서 박 대통령과 식사도중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 대통령의 시해 당시 상황을 현장검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비극의 현장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안방에서 박 대통령과 식사도중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 대통령의 시해 당시 상황을 현장검증하고 있다.

◇ "美, 12·12 군사쿠데타 모든 성격 띠고 있어" = 주한 미국대사관이 12·12 당일 보낸 '한국 쿠데타'라는 제목의 전문을 보면 "우리는 쿠데타라고 부르지 않도록 신경 쓰지만 군사 쿠데타의 모든 성격을 띠고 있다"며 사실상 쿠데타로 규정했다.

또 "권력 통제력은 기무사령부 사령관이자 강경파로 알려진 전두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며 미 국무부 배포용 성명을 첨부했다.

그러나 같은 날 또 다른 전문에서는 톤을 누그러뜨리는 수정 성명을 요청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통화에 따르면 반란자(insurgent)들이 그들의 요구를 군의 인사 변화에 국한하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신군부가 권력 찬탈이 아니라 군 인사 요구를 군사 행동의 목적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다.

또다른 전문을 보면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13일 미국에서 김용식 주미 한국대사를 불러 이번 일이 질서있는 정치적 변화의 과정에 역행하고 정치적 통제를 다시 불러온다면 한미 관계에 매우 중대한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이튿날 김 대사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미 정부 우려를 전달하고 최 대통령이 좀더 강력하게 행동하길 요청하는 강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전문은 김 대사에 대해 전두환의 육사 11기 동창인 안모 소장을 통해 신군부의 행동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국에 있던 최 대통령의 사위가 두 차례 최 대통령에게 전화해 더 강력하게 행동할 것을 전달하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내란죄 등 혐의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내란죄 등 혐의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기립해 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영국대사관도 12·12 당일 본국에 전문을 보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정황도 곳곳에 나온다.

12일 전문에는 "성공하지 못한 군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돼 있다. 또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 자택에 총격이 있었지만 장관은 다치지 않고 탈출한 반면 정승화 사령관은 살해됐을지 모른다고 적었다.

영국 대사관은 이틀 후인 14일 전문에서 이 쿠데타 계획이 2주 전에 착수됐다는 미 대사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18일 주미 영국대사관 전문을 보면 "이곳(미국)의 그림 역시 혼돈 상태로 남아 있다.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정치적 진화를 위한 동기에 관해 아무런 새로운 통찰력도 제공하지 않는다"며 미국 현지의 분위기가 나와 있다.

이 전문은 또 신군부가 박 전 대통령 시해에 관한 새로운 증거 확인을 위해 정승화 사령관을 찾아갔다 정 사령관이 과잉 반응해 체포했다고 설명했지만, 미국은 이를 믿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당시 군의 움직임이 체계적이었고, 이동 경로를 볼 때 선행계획이 있었다는 게 분명했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2·12 주모자들이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한 기념촬영 사진. 여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2·12 주모자들이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한 기념촬영 사진. 여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한국, 12·12 후 '北 무력남침 가능성' 들어 美 설득

당시 한국 정부는 12·12 후 북한의 무력 남침을 우려하는 정보 분석 문건을 제시하며 미국을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2·12 직후 미측에 전달된 '북괴의 무력남침 가능성에 대한 종합 분석'이라는 정부 문건에 따르면 '북괴의 무력도발 위험성에 관한 첩보'라는 항목에서 북한의 다양한 남침 시나리오 첩보가 있다고 돼 있다.

일본 외무성 동북아과장이 제공한 첩보를 소개한 대목에선 북한이 한반도 주변정세와 12·12를 결정적인 남침 기회로 오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면서 "금년 말부터 1980년 1월에 걸친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분석을 전했다.

또 주일 중국대사관 주재 인민일보 특파원이 제공한 첩보라면서 북한은 유리한 남침 환경이 조성됐다고 보고 남침계획 시기를 1980년 가을에서 앞당기려고 하고 있다면서 이는 10·26 때문이라고 적었다.

미국의 군사문제 전문지를 인용해 "한국전이 결코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며 무력충돌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음"이라고 표현하며 "북괴군이 남침을 감행할 시 미군에 대한 공격을 수반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10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한 뒤 국회의사당 의석에 앉아있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10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한 뒤 국회의사당 의석에 앉아있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 김영삼, 조기 선거 강조…美, 김영삼 제명에 큰 관심 = 글라이스틴 대사는 12월 20일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면담한 내용을 본국에 보고했다.

이 전문에 따르면 김 총재는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헌법 개정후 1981년 5월이나 6월 선거를 치르는 정치적 시간표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김 총재는 이런 긴 시간표는 재앙을 초래한다며 조기선거를 주장했다고 한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김 총재에게 미국이 민간정부를 지지하며 핵심 목표가 단결과 안보를 유지하고 북한을 부추기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재는 영국 대사관이 1980년 1월 전문에서 "다음 정부는 신민당 지도자인 김영삼에 의해 구성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거물이었다.

이에 앞서 미 대사관은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김 총재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뷰, 여기에서 촉발된 10월 4일 의원직 제명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미대사관은 김 총재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내용을 한국 언론이 많이 보도했다고 평가했다. 언론 보도가 통제된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는 취지다.

미 대사관은 김 총재 제명 후 보고한 전문에서 "김영삼의 제명은 언론의 집중 보도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상황은 조용해 보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 총재는 계속 싸울 것을 맹세했지만, 신민당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여당은 단결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대사관은 야당 탄압에 반발, 야당 의원들이 사퇴했다는 내용과 1979년 10월 부산대 학생들이 독재 타도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는 내용 등도 전했다.

또 박정희 정권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반정부 시위는 대구, 서울 등으로 확산했다는 내용 등 일련의 정국 흐름을 자세히 보고했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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