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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동행] 대구시민 '기부 DNA' 일깨운 익명의 '키다리 아저씨'

송고시간2020-01-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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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억원 기부 뒤 매달 1천만원 모아 연말되면 이자까지 내놔

"19세 가장 돼 가난의 애환 잘 안다"…'기부 바이러스' 산파역 톡톡

키다리 아저씨의 메모
키다리 아저씨의 메모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연합뉴스) 홍창진 기자 = "연말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분이 대구시민의 '기부 DNA'를 일깨웠습니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직원들은 연말이면 으레 익명 기부 천사와 만남을 기대한다. 이곳에서는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공동모금회 직원을 짧게 만나 거액의 성금을 내놓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는 모습에 언제부터인가 그런 별칭이 붙여졌다.

이곳 직원들과 그의 첫 만남은 2012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5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키다리 아저씨는 공동모금회 사무실을 방문해 1억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거액 기부도 놀라웠지만, 한사코 신원 밝히기를 꺼리는 그의 태도에 직원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김찬희 공동모금회 대리는 "8년 전 처음 사무실로 찾아와 성금이 어떻게 쓰이고, 어디에 지원되는지 등을 묻고는 망설임 없이 품에 든 수표를 꺼내셨다"고 말했다.

그는 "수표에 찍힌 동그라미 숫자를 헤아리다가 금액이 너무 커 깜짝 놀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그는 8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곳을 찾는다.

그동안 기부한 돈은 9억8천여만원에 이른다. 대구공동모금회 개인 기부액 가운데 최다 금액이다.

직원들이 1억원 이상 개인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권한 적이 있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기부금 전달식이나 사진 촬영 등도 사양했다. 자녀들에게도 기부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고 했다.

키다리 아저씨의 편지
키다리 아저씨의 편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 대리가 전하는 그의 모습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다.

첫 만남 이후 세월이 흘러 지금은 60대 중반으로 추정돼 보이지만, 처음과 달라진 점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김 대리는 "평소 건강관리와 함께 이타적인 마음이 젊고 건강하게 보이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평소 콤비 양복 등 수수한 차림으로 식당, 찻집 등 미리 정한 장소로 나온다고 한다.

공동모금회 대표전화나 김 대리 휴대전화로 연락해 "퇴근했는교? 시간 되면 잠깐 봅시다"라는 식으로 미팅을 제안한다.

만나서는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뒤 곧장 수표가 든 봉투를 내놓는 게 전부다.

그는 매달 1천만원씩 적금을 넣다가 연말에 이자까지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부인도 만남의 자리를 함께한다.

김 대리는 그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 아닌 소규모 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라고 설명한다.

이어 "적금 이자까지 통째로 기부하시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은행 금리 추이를 알게 된다"며 "금융권 금리변동으로 요즘 이자액이 줄더라"고 말했다.

그는 수표와 함께 심경을 담은 짤막한 메모를 함께 전하기도 한다.

"꼭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부가 못 찾아가는 소외된 이웃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등 친필로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성탄절을 앞둔 지난달 23일 그가 공동모금회에 내놓은 금액은 예년보다 적었다.

2천300만여원 수표가 든 봉투에는 '금액이 적어서 미안합니다. 나누다 보니까 그래요'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올해는 가족 이름으로 먼저 1억원을 기부해 금액이 적다"며 "다른 곳에도 나누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금액이 줄었다"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금액이 적어서 미안하다"는 키다리 아저씨 편지
"금액이 적어서 미안하다"는 키다리 아저씨 편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공동모금회 직원들은 이날 그로부터 몇 마디를 더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친을 일찍 여의고 열아흡 살 나던 해 가장이 돼 가족을 먹여 살리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애환을 잘 안다"고 말했다.

함께 온 부인은 "승용차를 10년 이상 타며 우리 부부가 쓰고 싶은데 쓰지 않고 소중하게 모았다"며 "갖고 싶은 것이 많지만, 나눔의 즐거움에는 비교할 수 없다"고 거들었다.

그의 선행은 지난 연말 자녀들에게도 처음 알려졌다.

언론에 보도된 메모 사진에서 낯익은 필체를 보고 의구심을 갖고 있다가 "아버지 맞지요?"라고 캐물어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도 내 뜻에 공감하고, '키다리 아저씨'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후 다른 복지기관에도 가족 명의로 기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공동모금회는 키다리 아저씨가 시민들의 '기부 DNA'를 일깨우는 역할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기부 기사에 악플이 거의 없고, 대부분 공감하는 데서 볼 수 있듯 시민 누구나 계기만 되면 나눔에 주저하지 않는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고 소개했다.

기사가 나간 뒤 공동모금회에는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에 동참하고 싶다"는 전화가 잇따랐다고 이희정 대구공동모금회 사무처장은 전했다.

이번 겨울은 경기침체 등으로 전국적으로 이웃돕기 성금 모금 실적이 저조한 편이지만, 대구공동모금회는 이미 목표액 100억2천만원을 조기 달성했다.

이 사무처장은 "키다리 아저씨 뜻이 후속 기부를 낳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며 "한 사람의 선행이 시민에게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realis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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