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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11년] ① "갈 곳이 없다" 도시개발에 밀려나는 아픔은 여전

송고시간2020-01-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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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일대 정비사업에 철공소·공구상 등 폐업 잇따라…"대체공간이라도 달라"

중구 양동 쪽방촌도 재개발지구 포함…도시빈민들 "겨우 마음 붙였는데 또 나가나"

17일 서울 중구 입정동의 한 공업사 문 앞에 붙은 세운지구 재개발 반대 스티커 [촬영 장우리]

17일 서울 중구 입정동의 한 공업사 문 앞에 붙은 세운지구 재개발 반대 스티커 [촬영 장우리]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여기 있는 철공소와 공구상들은 다 실과 바늘 같은 관계예요. 옆집에서 재료 가져와서 내가 깎고, 또 저쪽에서 빠우 치고(광택 내고)…. 흩어지면 곧 죽는 건데도 나가라고 하니까. 갈 데가 없다는 생각에 요즘은 밤에 잠이 안 와요."

'청계천 공구거리'가 있는 서울 중구 입정동 일대에서 평생 쇠를 만지고 살아온 장인들은 요즘 부쩍 한숨이 늘었다. 2014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 통과 이후 한동안 지체되는가 했던 을지로·청계천 일대 재개발사업이 눈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재개발 철거민 농성 강제진압 과정에서 6명이 숨진 용산 참사 11주기(20일)를 사흘 앞둔 지난 17일. 한국 제조업의 초기 역사를 담고 있는 청계천 공구거리에서는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철공소의 기계 소리가, 다른 쪽에서는 재개발 관련 철거작업에 투입된 굴착기 굉음이 각각 울리고 있었다.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상인·예술가들이 꾸린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 따르면 2018년 11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석 달 만에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 3-4, 3-5구역의 400여개 점포가 철거됐다. 철거된 자리에는 26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재개발로 밀려난 상인들이 공구거리 주변의 빈 점포에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세운상가와 종로 일대 임대료가 치솟았고, 일부 가게에는 수천만원의 권리금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 영등포구 문래동, 경기도 파주 등 먼 곳까지 이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옮길 곳을 찾지 못한 점포들은 아예 폐업 절차를 밟았다. 작년 8월 기준 세운3지구 상인들의 집계에 따르면 청계천에서 쫓겨난 점포의 20%가 넘는 100여곳이 문을 닫았다.

세운 3-6구역에 속한 한 공업사도 최근 재개발 시행사로부터 '협의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서류를 받았다고 한다. 아직 관리처분인가가 나지 않아 본격적인 철거 작업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이 구역의 몇몇 상인들은 이미 건물주와 협의해 가게를 비운 상태다.

공업사 사장 이모(57)씨는 "보상 방안을 협의하고 슬슬 점포를 비워달라는 뜻인데, 여길 나가면 수년 내로 폐업할 것이 뻔하다"며 "옆 가게들과 손쉽게 협업할 수 없게 됨은 물론 수십 년간 쌓아온 거래처도 다 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1983년부터 청계천에서 정밀가공 일을 해왔다는 조모(61)씨도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곳 공구거리를 해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씨는 "지난해 가게를 빼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도 (시행사로부터) 수억원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통장 가압류까지 당하니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었다"면서 "하다못해 우리가 모여서 일할 수 있는 대체공간이라도 제공하고 쫓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청계천·을지로 일대 재개발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자 서울시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해 1월 재개발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서울시는 "2019년 말까지 '보존'에 초점을 맞춘 종합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종합대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재개발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19일 "상인들과 최대한 합의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른 시일 내로 종합대책을 완성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이미 사업시행인가가 난 곳에 대해 (재개발을) 전면 백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대체공간 마련 등 상인들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서울역 일대 양동 재개발지구 쪽방촌
서울역 일대 양동 재개발지구 쪽방촌

[연합뉴스 자료사진]

개발사업으로 거주민들과 개발자 간 갈등이 빚어지는 곳은 청계천 일대뿐이 아니다.

중구 후암로 일대 '양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처럼 도시 빈민들이 다수 사는 지역은 쪽방촌 등에 거주하던 이들이 재개발로 밀려나면 더 낙후된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양동 11지구에 포함된 쪽방촌에서 3년째 지낸다는 허모(65)씨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겨우 이곳에 마음을 붙였는데 또 나가야 한다니 착잡하다"고 했다.

허씨는 "이곳에는 몸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200명 가까이 산다"며 "토끼풀도 관목도 한 곳에 어우러져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홈리스행동 등 시민단체가 쪽방촌을 돌며 모은 의견서에는 "여기서 사는 날까지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잘 살고 있는데 물러나라니요! 마음속이 허무해집니다. 좀 살개해주시요 재발부탁입니다(좀 살게 해 주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등 주민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담겼다.

홈리스행동 측은 "좁디좁은 쪽방에 산다고 해서 주거에 대한 권리마저 쪼개져도 되는 것은 아니다"며 중구청에 개발지역 쪽방 주민들의 주거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iroow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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