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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훈의 골프산책] 7년 만에 LPGA 제패 박희영 "떠밀려 은퇴하긴 싫었다"

송고시간2020-02-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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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고령 우승…"나이 들고 주부여도 뛸 수 있음을 보여준 게 보람"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박희영.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박희영.

[골프 오스트레일리아 제공]

(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 박희영(33)은 작년 10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볼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 클래식을 75위로 마친 뒤 아버지 박형섭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골프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며 울면서 말했다.

볼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 클래식은 LPGA투어 정규투어 마지막 대회는 아니지만, 이 대회 종료 시점 상금랭킹 80위 밖 선수는 더는 대회에 나갈 수 없다.

대회 종료 시점 상금랭킹 100위 밖이던 박희영에게는 사실상 시즌 마지막 대회가 됐다.

2018년 12월 결혼한 박희영은 신혼의 단꿈도 채 가시지 않은 채 2019년 시즌에 나섰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6개 대회에 출전해 톱10에 단 한 번도 들지 못했다.

상금랭킹 110위(10만3천327달러)에 그친 박희영은 2008년 이후 12년 동안 지켰던 투어 카드마저 잃었다.

그는 LPGA투어에서 기대만큼 많은 우승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최고의 볼 스트라이커라는 찬사를 받았기에 투어 카드 상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다시 LPGA투어에서 뛰려면 10살 어린 후배들과 함께 Q시리즈에서 경쟁해야 했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Q시리즈에서도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컸다.

"할 만큼 했고 지쳤다는 생각과 함께 여기까지인가 하는 한계도 느꼈다"는 박희영은 "은퇴하고 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먼저 했다"고 털어놨다.

은퇴하려던 박희영은 아버지 박 씨의 설득과 남편 조주종 씨의 격려에 마음을 돌렸고, Q시리즈에 도전하기로 했다.

경기도 안양 대림대 체육과 교수로 재직 중인 아버지 박 씨는 희영과 동생 주영(30) 등 딸 둘을 모두 프로 골프 선수로 키워냈고, 수많은 제자를 체육 전문가로 만들어낸 체육인이다.

박 씨는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모습을 보이고 그만두라"고 딸을 설득했다.

"아빠 말씀을 듣고 투어 카드를 잃어서 떠밀려 그만둔 것과 내가 원할 때 그만두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박희영은 "Q시리즈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밝혔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남편도 힘을 보탰다.

"내심 그만두는 걸 원했는지도 모르지만, 다시 도전해보겠다니까 '당신이 원하는 걸 하라'고 응원해줬다"는 박희영은 "아빠와 남편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Q시리즈 도전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용기를 얻은 박희영은 그러나 또 한 번 난관에 부딪혔다.

'악성 스트레이트 구질'이라는 시샘 어린 찬사를 받던 샷이 어느새 많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박희영의 동생 박주영을 가르치는 인연으로 Q시리즈 한 달 전에 박희영의 스윙을 점검한 나상현 코치는 "미스샷이 어느 한쪽으로 나면 대회는 뛸 수 있지만, 박희영의 당시 미스샷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다양했다"고 말했다.

한 달밖에 남지 않은 Q시리즈를 앞두고 전성기 스윙을 되살리기 위해 박희영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샷 회복은 빨랐다.

나상현 코치는 "워낙에 기본기가 탄탄하고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서 금세 좋았던 예전 스윙을 되찾더라"면서 "결혼 등으로 충분한 연습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투어를 계속 뛰다가 스윙에 균형이 다소 뒤틀렸는데 그걸 잡아주면서 빠르게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박희영은 "Q시리즈에서 떨어지면 정말 망신 아니냐. 죽기 살기로 연습에 매달렸다"면서 "덕분에 Q시리즈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Q시리즈에서 2위를 차지했다. 예전의 좋았던 샷이 돌아오자, 쇼트게임과 퍼트까지 덩달아 좋아진 덕이다.

무엇보다 박희영은 자신감이라는 큰 무기를 얻었다.

"사실 작년 성적으로는 더는 LPGA투어에서 뛸 자신이 없었다. Q시리즈를 치르면서 충분히 통한다는 자신이 생겼다"

자신감을 얻은 박희영은 지난 1월 게인브릿지 LPGA 앳 보카리오부터 출전을 서둘렀다.

순위는 공동 63위에 그쳤지만, 박희영은 "내 경기력에 더 자신감이 붙은 계기가 됐다"고 돌아봤다. 버뮤다 잔디 그린에서 고전한 바람에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겨울 동안 피나는 연습의 효과가 실전에서 나타났다.

그는 "Q시리즈가 끝난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체력과 스윙, 연습 라운드 등 새 시즌을 대비한 훈련 동안 남편이 시간 날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응원해주고 격려했다"면서 "힘든 훈련이었지만, 남편과 함께하니 힘든 줄 몰랐다"며 웃었다.

이번 호주 빅 오픈 때 몰아친 강풍은 박희영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박희영은 "내가 사실은 바람 부는 코스에서 공을 잘 치는 편"이라고 밝혔다.

그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치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준우승도 했고, 한국에 있을 때 바람 많이 부는 코스에서 주로 우승했다"면서 "그 때문인지 바람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대회 3라운드에서 웬만한 선수들은 대부분 오버파 스코어를 적어냈지만, 박희영은 이븐파로 버텨 선두권으로 도약했다.

최종 라운드에서도 챔피언조 선수들이 줄줄이 무너졌지만,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바람이 많이 불면 아무래도 경험 많은 선수가 유리하다"면서 "3라운드가 끝난 뒤에 우승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상위권 입상은 하겠다는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최종일 그는 4라운드부터 연장 3차전까지 18번 홀에서 네 번 연속 버디를 잡았다.

"4라운드 18번 홀 시작하면서 캐디한테 내 순위를 물어봤더니 1타차라고 하더라. 반드시 버디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티샷부터 공격적으로 쳤다"는 박희영은 "연장 가서는 퍼트할 때마다 넣자는 욕심보다는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퍼트와 다를 바 없는 퍼트'라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고 공개했다.

연장 네 번째 홀에서 그는 최혜진(21)의 잇따른 실수로 그린에 볼을 올리기도 전에 우승을 확정하다시피 했다.

최혜진이 다섯번 친 볼이 박희영이 두 번 친 볼과 비슷한 그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대 박희영과 최혜진이 그린 앞에서 한동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TV 중계 화면에 잡혔다.

박희영은 "(최)혜진이가 챔피언 퍼트를 하는 게 TV 화면에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나한테 플레이를 계속하라고 했다"면서 "마음씨가 착하더라. 볼은 기가 막히게 잘 치는데 아직 아기"라며 깔깔 웃었다. 최혜진과 박희영은 띠동갑 12살 차이다.

그는 "처음 함께 경기를 해봤는데 LPGA투어에 와도 잘할 것"이라고 최혜진의 경기력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시상식을 마친 박희영은 남편 조 씨와 반가운 통화를 했다.

남편 조 씨는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귀국할 때) 공항에 커다란 플래카드 들고 나갈까"라며 아내의 우승을 더없이 반겼다.

박희영은 "플래카드 말고 종이 한장만 들고나와도 좋다"고 화답했다.

부부는 박희영이 호주오픈을 마치고 한국으로 오는 17일 재회한다.

이번 시즌을 시작하면서 "우승하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목표를 마음속에 넣어뒀던 박희영은 "너무 빨리 우승을 이뤄 다음 목표를 뭐로 잡을지 고민이 된다"고 털어놨다.

"첫 우승을 하고 나니 두 번째 우승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라는 박희영은 "3월에 열리는 LA오픈 개최지 윌셔 컨트리클럽 회원이다. 신혼집이 바로 옆에 있다. 회원 상당수가 동네 주민인데 거기서 우승 한번 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국인 최고령( 32세 8개월 16일) LPGA투어 우승 기록을 세운 박희영은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 같아 뿌듯하다"면서 "나이가 들고, 결혼해 주부가 되어도 훌륭하게 선수로 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게 보람"이라고 말했다.

kh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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