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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코로나19 삭풍에도 바티칸 노숙인 품는 한국인 수녀

송고시간2020-03-2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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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야고보 수녀, 바이러스 위협 속 흔들림없이 성베드로광장서 음식봉사

코로나19에 노숙인 생존 위협…이탈리아 주요 도시에만 5만 명

(바티칸시티=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서 지내는 노숙인과 반갑게 인사하는 박야고보 수녀. 2019. 12. 5.

(바티칸시티=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서 지내는 노숙인과 반갑게 인사하는 박야고보 수녀. 2019. 12. 5.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이탈리아 정부가 전국에 이동제한령을 내린 수도 로마의 거리는 적막감에 휩싸여있다.

콜로세움, 판테온, 스페인광장, 트레비분수 등 평소 관광객들로 들끓던 시내 명소들은 행인보다 단속 경찰관 수가 더 많은 진귀한 장면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활달하고 사교성 좋은 이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마저 바꿔놨다.

로마 시민들은 집에서 24시간 머무는 생활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고령자 외에 젊은이들은 생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활이다.

이런 초유의 사태 속에 집 없이 거리에서 사는 이들은 이 역경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코로나19 같은 역병이 돌 때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지붕 없이 사는 노숙인들이다. 사람들이 안전거리를 유지한다며 서로에게 거리를 둘 때 노숙인은 생존을 위협받는다.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안부 묻는 박야고보 수녀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안부 묻는 박야고보 수녀

(바티칸시티=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박야고보 수녀가 지난 5일(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인근 지하인도에서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안부를 묻고 있다.
야고보 수녀는 4년째 매주 목요일마다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식사와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2019.12.16 photo@yna.co.kr

하루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무료 급식소는 일찌감치 폐쇄됐고 이탈리아 정부의 비필수 업소 영업금지령으로 식당들마저 문을 닫아 배가 고파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영국판은 최근 관련 기사에서 "노숙인들은 코로나19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고 역병에 따른 경제·사회적 위기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들이지만 또한 가장 쉽게 간과되는 이들"이라고 썼다.

이 엄혹한 상황에서 로마에서 거주하는 '꽃동네' 소속 박야고보(본명 박형지) 수녀의 흔들림 없는 선행은 다시 한번 주목하고 있다.

작년 12월 16일 연합뉴스에서 '바티칸 노숙인들의 동반자'로 소개한 야고보 수녀는 코로나19의 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묵묵히 바티칸 성베드로광장 노숙인을 지켜주고 있다.

야고보 수녀는 2015년 11월 초부터 매주 목요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이곳 노숙인들을 위한 '주먹밥 만찬'을 준비해왔다.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역병 사태를 맞아 당연히 활동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지레짐작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온정의 손길 전하는 박야고보 수녀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온정의 손길 전하는 박야고보 수녀

(바티칸시티=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박야고보 수녀(왼쪽)가 지난 5일(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으로 봉사를 나가기 전 노숙인들에게 나눠줄 주먹밥을 준비하고 있다.
야고보 수녀는 4년째 매주 목요일마다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식사와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2019.12.16 photo@yna.co.kr

전 세계적인 교류를 일시에 중단시키고 글로벌 경기마저 끌어내린 코로나19의 위력도 야고보 수녀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 것이다.

야고보 수녀는 26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4년간 지킨 의리가 있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냐"며 웃었다.

모두가 위험하다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자신마저 떠나면 오갈 데 없는 그들의 한 끼는 누가 챙겨주냐는 생각에 활동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바이러스가 이탈리아 전역을 휘감으며 사망자가 쏟아져나오는 등 인명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소식에 야고보 수녀 역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너무 위험한 일이라며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이것마저 그만두면 나중에라도 그들을 볼 면목이 없을 거 같다며 고민을 떨쳤다"고 야고보 수녀는 전했다.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온정의 손길 전하는 박야고보 수녀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온정의 손길 전하는 박야고보 수녀

(바티칸시티=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박야고보 수녀가 지난 5일(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야고보 수녀는 4년째 매주 목요일마다 바티칸 노숙인들에게 식사와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2019.12.16 photo@yna.co.kr

야고보 수녀는 음식 장만과 현장 배식을 지원해온 신부·수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료 수녀와 단둘이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모두가 동시에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행여나 자신이 감염돼 격리되는 상황이 오면 신부들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담겼다.

노숙인들도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아는 터라 야고보 수녀가 주먹밥을 주고자 다가오면 스스로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고 한다. 야고보 수녀는 그들의 그러한 배려심이 고맙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모든 게 단절된 상황이라 노숙인들이 하루 한 끼를 채우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주먹밥 하나를 만들 때 들어가는 밥의 양도 더 늘렸다고 한다.

야고보 수녀는 "이탈리아 정부의 이동제한령으로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 모여드는 노숙인 수가 더 늘었다"며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길 묵묵히 기도하며 그들과 함께 이 고난을 헤쳐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숙인과 함께 하는 유럽 비영리조직 'FEANTSA'에 따르면 이탈리아 주요 도시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수는 5만여명이며, 이 가운데 로마에는 8천여명의 노숙인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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