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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탁의 탁견] '인디언 헤드 작전'과 6·25 전쟁

송고시간2020-06-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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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입성 국군과 UN군
평양 입성 국군과 UN군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탈환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성하고 있다. 1950.10.19 (임인식=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펼쳐진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단번에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합니다.

한 달 뒤인 10월15일부터 20일에 걸쳐 '평양탈환작전'이 전개됩니다. 누가 먼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심장, 평양에 깃발을 꽂을 것인가. 숨 가쁜 전투의 연속입니다.

한국군 제1사단과 미국 제7기병사단이 북한군 17사단과 32사단 잔류병과 접전을 벌입니다. 미 7기병사단 5기병연대 소속 F중대가 10월 18일 11시를 즈음해 동평양에 최초 입성합니다. 한국군 1사단은 10월 19일 새벽 1사단의 주공 12연대가 최초로 동평양에 입성한 데 이어 15연대가 본평양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평양 입성'순서를 놓고 여러 얘기가 있지만, 전쟁사는 최초의 '평양 입성부대'를 한국 1사단으로 기록합니다.

평양탈환작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0월 20일 평양에 '인디언 헤드' 마크를 부착한 미군들이 들어옵니다. 평양 시가지를 선점한 1사단장 백선엽의 증언입니다.

"20일 아침, 미2사단 '인디언 헤드' 마크를 부착한 한 미군 중령이 약 1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자기들은 GHQ(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수집반인데 평양 시가지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허락하자 그들은 즉각 평양 시내 공공건물들을 수색해 수많은 문서를 노획, 도쿄 GHQ로 실어 갔다."(《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서)

6.25전쟁, 평양 탈환 작전시 노획한 북한기
6.25전쟁, 평양 탈환 작전시 노획한 북한기

[촬영 이상학]전쟁기념관

인디언 헤드(Indian Head)' 특수임무 부대는 그렇게 전장의 한복판에서 북한 정권이 제대로 파기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문서들을 훑어갔습니다.

'인디언 헤드 작전'은 미국 대외정책 수립을 책임진 국무부 정책기획실의 지시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국무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소련 위성국의 성립과정과 지배 양태를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특수부대를 조직해 북한 내부로 투입하도록 극동군 사령부에 지시합니다.

워싱턴 훈령에 따라 극동군 사령부는 북한문서 수집 임무를 미8군 사령부에 지시했고. 인디언 헤드 부대가 편성됩니다. 인디언 헤드는 미 2보병사단 부대 마크입니다. 백선엽이 만난 미군 중령이 바로 인디언 헤드 부대장인 미2사단 정보참모 포스터 중령입니다.

인디언 헤드 부대는 평양 시내에 산재해있던 북한 정권의 주요 시설물을 샅샅이 뒤져 '가치 있는 문서들'을 대거 일본 도쿄의 극동군 사령부로 후송했고, 이 문서들은 다시 워싱턴으로 공수됐습니다.

2012년 6월, 기자는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를 방문했습니다. 신분증을 제출하고 소정의 절차를 거쳐 자료실에 입장해서 평소 꼭 확인하고 싶었던 1950년 6월의 한반도와 관련된 '사료(史料)'들을 열람했습니다. 사서에게 자료요청서를 건네면 통상 그다음 날 문서들을 찾아 박스째로 전해주곤 했습니다.

일주일가량을 출근하다시피 했지만 제가 살펴본 자료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세계최강, 미국의 힘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기록의 세계'에서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보관소가 미국 각지에 17개나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2차 대전의 패전국 일본과 독일의 문서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북한노획문서(RG 242, Records Seized by US Military Forces in Korea)·의 전체 추정 분량이 192만여 쪽에 달하며 인디언 헤드 부대에 의해 수집된 게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NARA의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이 사료들이 한국전쟁을 놓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잠재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노획문서 중에는 ▲1950년 6월 24일 인민군 사단장들이 공격 개시일과 시간을 하달받은 문서 ▲6월 25일 05시 춘천 정면 인민군 제2사단이 전차를 선두로 해서 38선을 넘는 과정을 담은 문서 등이 있었습니다.

또 북한군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물론이고 북한군의 교육훈련용 책자 및 걸개(교안), 공문, 각종 선전 포스터, 북한 땅에서 통용됐던 지폐, 인민군 신분증, 인민군 병사의 편지 등이 망라됩니다.

한국어로 된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러시아어로 된 문서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소련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6·25 전쟁을 앞두고 만주에서 대거 입국한 연안계 인민군 등이 편하게 읽었을 중국어로 된 무기 사용법과 관련된 것들도 있습니다.

북한노획문서의 존재는 1980년대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학자 방선주 박사의 노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극비문서'와 함께 '북한노획문서'는 한국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임을 보여주는 '역사의 증언'입니다.

6·25 전쟁 70년을 맞아 잠시 눈을 감고 메릴랜드 NARA의 고즈넉함을 떠올려봅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역사를 증명할 '기억 저편의 문서'들이 연구자들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lw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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