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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탁의 탁견] 2002년 여름, 볼턴은 왜 서울에 왔을까

송고시간2020-07-0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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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미국무차관 연설
존 볼턴 미국무차관 연설

toadboy@yna.co.kr

<저작권자 ⓒ 2003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책 '그 일이 일어난 방:백악관 회고록'을 둘러싼 많은 얘기가 오가면서 잊히지 않는 과거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북핵 취재 노트인 졸저 '오바마와 김정일의 생존게임'(2009, 창해)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2002년 봄부터 한반도 정세는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해 4월 한국의 임동원 대통령 특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납니다. 잠시 냉각기를 가졌던 남북 관계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됐습니다.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2008년, 창비)에서 그때 김정일이 서울 답방 대신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입장을 밝혔고, 남측은 대안으로 판문점 회담을 제시했다고 밝힙니다.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이 합의(실제 방북은 그해 9월 성사)되는 등 북일 관계도 변곡점을 맞던 때입니다. 1994년 북한과 미국이 서명한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매년 북한에 중유가 제공됐고, 북한 땅 신포에 경수로 2기 건설이 활발하게 추진됐습니다.

그러던 8월의 어느 날,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이었던 볼턴이 서울에 들어옵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기세등등했던 강경파의 핵심인 볼턴이 등장한 겁니다. 그는 이태식 외교부 차관보를 만나 모종의 '정보'를 전합니다. 한국 정부 내 안보 진용이 바짝 긴장합니다.

'북한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의 심각성'이 담긴 정보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북한과 미국 간 1994년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 동결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북한의 핵시설은 '플루토늄 방식의 핵 개발'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플루토늄 방식이 아닌 고농축 우라늄 방식의 핵 개발 프로젝트를 북한이 은밀히 추진했고, 그 관련 정보를 볼턴이 들고 온 겁니다. 플루토늄 방식과 달리 HEU는 은닉하기가 용이해 전 세계 비확산체제를 주도하는 미국의 군축라인에서는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볼턴이 전한 정보는 임동원에게 보고됐습니다.

당시에는 볼턴이 전했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핵심인사들을 만나면서 그 윤곽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볼턴이 방한하기 두 달 전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2002년 6월 국가정보판단(NIE)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HEU 설비 건설을 위한 '재료구매 시작'을 언급합니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잭 프리처드도 "2002년 6월 하순에 입수한 정보들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핵무기를 만드는 프로그램에 착수했음을 명확히 보여 준다."(그의 책, '실패한 외교'에서. 2008년, 사계절)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볼턴은 CIA 등이 확보한 정보나 첩보 내용을 '결정적 증거'로 들이밀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것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볼턴은 주로 미국 공화당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주로 미국의 세계패권과 핵 군축과 관련된 일을 해온 그의 내공은 나름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에 대해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강하게 반발합니다. 한반도 전략을 주도한 임동원은 "네오콘 강경파들이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 첩보를 과장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피스메이커)고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은 2007년 3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토론회에서 "HEU 문제는 갑갑했다. 관련 기관도 뾰족한 답이 없었고, 미국으로부터 확정적이라고 할 증거나 정보를 받은 기억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2007년 봄인가 인사동 초입의 한 찻집에서 만난 양성철(볼턴 방한 당시 주미대사)은 현장감 있게 전합니다. 두툼한 자료를 갖고 온 그는 한참을 설명하더니 "이자들이 한반도를 흔든 겁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이 HEU 추진과 관련된 설비들을 밀수입해 왔으며, 이를 클린턴 행정부도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을 많은 문서가 증명해 줍니다. 당시 제가 만난 익명의 외교부 고위 당국자도 "북한이 HEU를 추진했음을 말해 주는 정보들이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미국이 전해준 정보에 대한 신뢰가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회자한 용어가 '정황적 증거'라는 말입니다. 확실히 의심할만한 정황을 말해주는 정보이지만 단정할 수 없을 때 쓰곤 하는 용어입니다.

클린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합의'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협상을 통한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진 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정보라 하더라도 이를 다루는 주체가 누구냐를 잘 봐야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그해 10월 초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북한으로 파견한 겁니다. 북한 외교의 실세 강석주와 10월 4일 만난 켈리는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건넵니다.

강석주가 "나는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과 정부를 대표해 여기에 왔다."고 말문을 연 뒤 "우리가 HEU 계획을 갖고 있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우리는 HEU 계획을 추진할 권리가 있고,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돼 있다."고 말합니다. 기록에 따라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요약됩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싸움은 노골적입니다. 이른바 2차 핵 위기의 발단이 된 '평양의 충돌'입니다. 강석주의 말을 놓고 북한이 HEU 보유를 시인한 것이냐를 놓고 지금도 여러 말들이 오갑니다. 평양에서 한국어 통역은 통 김이 했습니다.

켈리의 추궁에 대해 강석주는 간단하게 "우린 그런 것이 없다."라고 부인하면 됐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밤새 공화국 수뇌부의 총의'라면서 전해 준 말은 "만들게 돼 있다"는 알쏭달쏭한 내용입니다. (2010년 가을 북한은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를 평양으로 초청해 HEU 생산을 위한 첨단 원심분리기 시설들을 보여주었다)

켈리 차관보는 서울을 경유해 워싱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워싱턴 주요 언론들을 통해 '평양의 충돌'이 보도됐고, 이는 곧 HEU 파동으로 비화했습니다. 북한의 핵 동결과 대북 지원, 그리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지향했던 제네바 합의 체제는 붕괴했습니다. 그리고 불어닥친 한반도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더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알 겁니다.

그때 HEU 파동을 연출해낸 주역들이 누구였을까요. 저는 볼턴 당시 차관을 중심으로 로버트 조지프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비확산담당 보좌관, 존 맥로린 당시 CIA 부국장 등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유명한 네오콘입니다.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정연주 제작] 일러스트

워싱턴의 오른쪽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요직을 장악하는 그들입니다. 물론 워싱턴의 왼쪽, 그러니까 민주당 계열의 전문가들도 다수 있습니다.

흔히 "정보작전의 목표는 진실이 아닌 승리를 위한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볼턴을 위시한 네오콘들은 백악관, CIA와 국무부 뿐 아니라 대북 제재를 담당하는 재무부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또 얽히고설킨 인연들을 활용해 보수 언론에도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HEU 파동을 더욱 극적으로 세계에 전달할 모든 요소를 장악한 겁니다. 주요 싱크탱크에도 그들의 친구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결정적 증거'를 북한에 직접 보여주면서 해명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시나리오를 그린 겁니다. '평양 특사'를 통해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겁니다. 어쩌면 강석주의 말이 그들이 원하는 100%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세계 곳곳을 안방 들여다보듯 감시하는 그들은 언제든 엄청나게 수집해온 각종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으면 그 어떤 사람도 빠져나가기 힘든 국면을 만들어낼 힘이 있습니다. 2002년 여름이나 2019년 봄 하노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일이란 게 희망 의지로만 이뤄지는 게 아님을 절실히 알아야 합니다. 워싱턴의 좌우만 알아서도 안 됩니다. 평양을 움직이는 수령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구사하는 전략과 계산도 알아야만 합니다. 기어이 핵을 손에 쥔 그들입니다.

정말로 좁디좁은 통로를 거쳐야만 다음 단계로 건너갈 수 있는 한반도의 오늘입니다. 정파를 떠나, 서울의 좌우에도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활약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lw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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