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연합뉴스 최신기사
뉴스 검색어 입력 양식

'학도병 모집 연설' 평생 괴로워했던 손기정

송고시간2020-08-08 08:00

이 뉴스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본문 글자 크기 조정

데라시마 젠이치 일본 메이지대 명예교수 '손기정 평전' 번역 출간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가난한 식민지 청년의 한과 설움을 안고 달려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영예를 안았던 고(故) 손기정 선생의 일생과 스포츠 철학을 담은 데라시마 젠이치(寺島善一) 일본 메이지 대학 명예교수의 '손기정 평전'(사회평론사)이 9일 번역 출간된다. 이날은 선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날이며 56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까마득한 후배 황영조 선수가 우승한 날이기도 하다.

선생의 모교인 메이지 대학교수로서 여러 차례 선생과 만난 적이 있는 데라시마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과 언론 보도, 선생의 자서전을 비롯한 관계 인물들의 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참된 올림픽 정신을 구현한 선생의 생애를 정리했다. 그는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일본 한류 붐 등을 계기로 조성된 한국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가 최근 양국의 정치적 문제로 붕괴해 역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집필을 서두르게 됐다고 한다.

황영조와 함께
황영조와 함께

손기정 선생(오른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황영조 선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책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운동에 전념해 올림픽에서 우승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청년기를 거쳐 후진 양성과 스포츠를 통한 국제 우호 증진에 앞장선 광복 이후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시대순으로 정리한다. 1912년 신의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상급 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으나 압록강 변을 달리며 육상 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진학을 포기하고 인쇄소에서 일하게 된 선생은 "또래 아이들이 인쇄소 앞을 지나 즐겁게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절로 눈물이 솟구쳤다"고 뒷날 자서전에 썼다. 그리고 그에게는 앞으로도 눈물을 흘릴 일이 수없이 많이 닥친다.

가게 점원 등으로 일하며 틈틈이 육상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곤 했던 선생은 그의 재능과 열정을 알아본 이들의 도움으로 육상 명문 양정고보(현 양정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주변의 도움을 얻어 학비와 숙소는 간신히 해결했으나 식비까지는 어쩌지 못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일이 이어졌다. 운동은커녕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운 나날을 견디지 못한 선생은 체육 교사를 찾아가 "배가 고파서 못 뛰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울고 매달렸다. 교사는 보잘것없는 급여 가운데 2원을 '영양비'로 내줬고 덕분에 선생은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장거리 육상에서 마라톤으로 전향한 선생은 곧 두각을 나타내 일본 정상권 선수로 도약했다. 베를린 올림픽 참가 선수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에서도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으나 식민지 출신의 올림픽 출전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일제 당국자들의 갖은 방해에 시달렸다. 선생과 남승룡 선수, 일본 선수 2명 등 모두 4명을 현지에 보내 올림픽 직전에 최종 예선을 치러 참가 선수 3명을 확정한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이런 치졸한 방해를 극복하고 선생과 남승룡 선수가 나란히 1, 3위를 차지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시상대에 선 그에게 유니폼의 일장기와 경기장에 울려 퍼진 기미가요(일본 국가)는 견디기 어려웠다. 선생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일본인들에게는 이 눈물은 조국 일본에 마라톤 우승의 영광을 바친 감격의 눈물이라고 둘러댔다"고 회고했다.

시상대의 손기정
시상대의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생.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귀거래사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과 찬사가 아닌 감시와 탄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인'이 금메달을 딴 것이 못마땅했던 일제는 시상식 때 선생이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는 행동을 한 데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까지 터지자 선생을 '위험 인물'로 다루기 시작했다. 선생이 귀국할 때는 칼을 찬 일제 경찰이 범죄자처럼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연행하듯이 환영 인파로부터 분리했다. 일제는 환영 모임도 일절 금지했다.

더욱 나쁜 것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선생에게 일본 정부가 육상을 금지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태어난 이래 달리는 것에 삶의 보람을 느끼고 계속해서 달려온 손기정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어느 날 대학 경주부로부터 '하코네 역전 경주대회'의 한 구간만이라도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런 사정이 있는 선생은 달릴 수 없었다. 그 원통함이 얼마나 컸던지 아들인 정인씨는 2002년 선생이 숨을 거둘 때 "하코네 역전에서 뛰고 싶었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선생에게 한을 남긴 일은 '학도병 모집'을 위한 연설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점점 군국주의 색채를 더해가던 일본은 조선의 유명인들에게 학도병 모집에 나서도록 강요하는 일이 빈번했고 선생에게도 압력을 가해왔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헌병은 선생을 여기저기의 중등교육기관에 파견해 학도병 모집 연설을 하도록 강요했다. 만년에 선생은 이 연설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저자는 "그 심정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조선의 무구한 학생들에게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달라'고 말하는 것이 가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고 밝혔다.

손기정 기념관에서 자리를 함께한 저자와 역자
손기정 기념관에서 자리를 함께한 저자와 역자

왼쪽부터 저자 데라시마 젠이치(寺島善一) 일본 메이지 대학 명예교수, 공동번역자 김연빈 귀거래사 대표, 김솔찬 씨 [귀거래사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일제의 부당한 대우와 멸시, 차별로 고통을 겪었지만, 선생은 한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쟁으로 한국 선수가 출전할 수 없었던 1951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일본 선수 다나카 시게키에게 전쟁통임에도 "다나카 군의 우승은 아시아의 우승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복합니다"라고 축전을 보냈다. 그 이후 일본을 오가며 '스포츠를 통한 국제평화 실현'이라는 이상을 널리 전파하는 활동을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에 반대하는 스포츠인들의 정신을 계승한 '스포츠와 평화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이 같은 취지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당시 모임의 사회를 봤던 저자가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모양새로 비칠 가능성을 우려하자 선생은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제 발언으로 귀국 후 문제가 된다면 싸우겠습니다"라고 의연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선생은 한일국교 정상화 25주년과 한국 프로야구 발족 10주년을 기념해 양국이 4년에 한 번씩 프로야구 교류 경기를 벌이기로 합의하는 데도 막후에서 역할 하는 등 음으로 양으로 양국 스포츠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저자가 바라본 손기정 선생은 스포츠의 가치는 '스포츠인 상호의 존경, 신뢰, 우정'에 있다고 확신했다. 저자는 평전의 후기에 "일본 독자들이 손기정의 인생에 드리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가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고, 맨발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았는지, 그 역사의 일단을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썼다.

주일 한국대사관 해양수산관·국토교통관으로 근무하는 등 41년간 해양수산부에서 봉직한 후 지난해 정년퇴직한 김연빈 도서출판 귀거래사 대표가 번역가 김솔찬 씨와 함께 번역했다. 한글판에는 손기정 선생의 활약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변 인물들을 정리한 '손기정 인물사전'과 역자 후기 '일본은 손기정을 버리고 한국은 남승룡을 잊었다' 등을 추가했다. 224쪽. 1만8천원.

'학도병 모집 연설' 평생 괴로워했던 손기정 - 4

cwhyna@yna.co.kr

댓글쓰기
에디터스 픽Editor's Picks

영상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