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물이 안 빠지니 벼가 숨을 못 쉬어요, 올해 농사 다 틀렸어요"

여운창 기자 기자 페이지

(나주=연합뉴스) 송형일 기자 = "저 황토물 속에 자식 같은 벼가 이틀 넘게 잠겨 있는데…올해 농사는 다 틀린 것 같습니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들에서 11만여㎡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 임형옥(62) 씨.

20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나름 대농의 꿈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3일간 내린 폭우는 무심하게도 이 모든 것을 삼켰다.

영산강 수위가 관측 이래 최고의 수위를 기록한 지난 8일 오전 영산강과 맞붙어 있는 문평천 둑까지 무너지면서 1천ha가 넘는 죽산들은 한순간에 대형 호수로 변했다.

이곳이 며칠 전까지 벼가 무럭무럭 자랐던 푸른 들판이었는지 상상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9일 오후 들어 물이 조금씩 빠져나가면서 폭우 때 윗부분만 보였던 전봇대를 중간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임씨는 "조생종은 이삭이 팼고, 만생종도 이삭을 머금고 있는데 저 물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루만 물에 잠겼어도 어떻게 살려보겠는데 이렇게 길어지면 벼가 호흡을 못 해 아예 썩어버린다"며 "대책 자체가 없다"고 막막해했다.

죽산들 주변에는 대형 배수 펌프장이 4곳이나 있지만, 하늘이 구멍 난 듯 쏟아진 폭우와 상류에서 밀려온 강물에 곧바로 침수돼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펌프장은 침수된 지 하루가 지났으나 여전히 가동 중단상태고 농민들은 영산강 수위가 낮아지기만을 바라는 상황이다.

그나마 영산강 수위가 빠르게 내려가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폭우 때는 영산강 수위가 죽산들보다 더 높아 강물이 역류했지만 수위가 낮아지면서 자연 배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화면 나주시 다시면장은 "죽산들에서 농사를 짓는 마을만 10곳이 넘는다"며 "영산강 중하류에 위치한 죽산들은 예부터 쌀 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인데 피해가 큰 걱정이다"고 말했다.

농민과 지자체는 침수 기간이 2∼3일을 넘기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볼 것으로 걱정한다.

특히 침수 규모가 광범위해 배수 기간이 2~3일은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태풍까지 올라오고 있어 시름이 더욱더 깊어지고 있다.

농민들은 이번에 둑이 터진 문평천이 둑 높이가 낮고 폭도 좁아 늘 위태했다고 말한다.

임씨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둑 높이는 공사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결국 터졌다"며 "이제라도 한시 빨리 대책을 세워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nicepe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0/08/09 14:06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