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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의 게임인] e스포츠 표준계약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길

송고시간2020-09-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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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부당계약 폭로 '카나비 사태', 표준계약서 제정으로 이어져

계속 보완하고 실태조사 강화해야 오명 아닌 성장통으로 기록될 것

e스포츠 대회 현장 모습
e스포츠 대회 현장 모습

* 위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라이엇게임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을(선수)이 중대한 질병에 걸리거나 상해를 당할 경우 갑(e스포츠팀)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을이 연락이 두절되면 갑은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5천만원의 위약금을 물릴 수 있다.'

지난해 한 신문사가 당시 바른미래당 소속 하태경 의원실과 함께 입수해 공개했던 e스포츠 선수 '카나비'(본명 서진혁)의 계약서는 e스포츠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충격을 줬다.

e스포츠 관계자들의 폭로로 시작한 이른바 '카나비 사태'(팀명을 따 '그리핀 사건'으로도 불림)는 미성년 선수와 계약에서 게임단이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던 업계 병폐를 드러냈다.

미성년 선수 계약·이적 과정에 강요·협박이나 다름없는 대화가 오가고, 계약서도 '노예 계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공정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한국e스포츠협회(KeSPA) 'e스포츠 명예의 전당 [한국e스포츠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e스포츠협회(KeSPA) 'e스포츠 명예의 전당 [한국e스포츠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카나비 사태 이후 거의 1년이 지난 요즘 e스포츠 관계자들을 만나다 보면 간혹 억울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게임이 제대로 된 산업은커녕 취미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게임이 애들 놀이지 무슨 e스포츠냐'며 조롱받던 시절부터 이 산업을 개척해온 사람들이 '악덕 고용주' 취급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선수들이 나태해지거나 방황하기 쉬운 나이대이다 보니 하면 안 되는 일 위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취지로 계약서를 쓰는 경우가 있었다"며 "업계에서도 그런 것은 구시대적 계약으로 취급해왔다. 일반화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나비 사태가 미성년 선수의 권리에 관해 e스포츠계가 처음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은 e스포츠 관계자들이 잊으면 안 된다.

카나비 사태로 인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첫 'e스포츠 선수 표준계약서'를 제정했다.

표준계약서에 따라 이제 e스포츠팀은 선수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없다.

선수가 계약 내용을 위반할 경우에도 30일간의 유예 기간을 줘야 하고, 계약을 해지할 때는 상호 합의를 거쳐야 한다.

e스포츠팀이 청소년 선수의 건강권, 학습권, 인격권, 수면권, 휴식권, 자유 선택권 등 기본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도 표준계약서에 명시됐다.

청소년 선수는 활동 시간 상한 규정도 마련됐다. 15세 미만은 주당 35시간 이내, 15세 이상은 주당 40시간 이내다.

청소년 선수의 부모 등 법정대리인이 e스포츠팀을 상대로 계약 정보나 정산 명세를 제공하도록 요청할 권리도 앞으로 보장된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제 표준계약서는 카나비 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문체부와 업계가 함께 표준계약서를 꾸준히 보완해야 한다.

대표적인 쟁점이자 장기 과제로 꼽히는 것은 '후원금'이라는 표현이다.

프로게이머가 선수 활동의 대가로 정기적으로 지급받는 돈을 흔히 '프로게이머 연봉'이라고 부르며 노동에 따른 임금인 것처럼 말하지만, 계약서상에는 '후원금'으로 적힌다.

프로 스포츠 선수는 현행법상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으며, 선수 활동 역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단체·노조나 노동 전문가들 쪽에서는 "프로 스포츠 선수도 일반적인 노사 관계나 다름없이 종속적 계약 관계를 맺고 근로 지휘를 받으므로 근로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온다.

물론 대법원 판례가 나오거나 국회에서 입법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e스포츠 산업이 건강한 토양을 다지려면 문체부, 협회, e스포츠 팀들이 추후 또 다른 계약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매년 시행하는 'e스포츠 실태조사'도 실효성을 제고해야 한다.

당국은 e스포츠 실태조사 결과를 2013년부터 공표하고 있는데, e스포츠 산업 규모의 성장세에 주로 초점을 맞춰 보도자료를 낸다.

언론에서는 '프로게이머 평균 연봉'이 전년 대비 얼마나 올랐는지를 부각하며 자극적인 관심만 유도하고 넘긴다.

지금까지 실태조사에도 프로게이머들의 평균 연습 시간과 휴식 수준 등 근로 환경 관련 내용이 일부 담겼지만,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

표준계약서가 실효성 있게 선수들 권리를 보호하는지 조사해야 하고, 형식적인 조사에서 털어놓지 못하는 다른 인권 침해 피해는 없는지 심층 조사도 해야 한다.

그래야 카나비 사태가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 성장통으로 기록될 것이다.

[※ 편집자 주 = 게임인은 게임과 사람(人), 게임 속(in) 이야기를 다루는 공간입니다. 게임이 현실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두루 다루겠습니다. 모바일·PC뿐 아니라 콘솔·인디 게임도 살피겠습니다. 게이머분들의 많은 제보 기다립니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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