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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위로와 격려의 공간…한국의 숨은 민간 정원 ② 장수

송고시간2020-11-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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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타샤 튜더' 임지수 씨의 자연주의 정원

(장수=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임지수 씨는 서울 광화문에서 직원 100여 명을 둔 IT 관련 회사를 운영하다 청산하고 전북 장수로 내려가 정원사가 됐다.

10여년간 꽃과 나무에 미쳐 정원을 가꿔온 그는 '한국의 타샤 튜더'로 불린다.

임씨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살아가는 나날들이 즐겁다고 말한다.

연못에서 노니는 진돗개를 바라보는 임지수 씨 [사진/성연재 기자]

연못에서 노니는 진돗개를 바라보는 임지수 씨 [사진/성연재 기자]

타샤 튜더(Tasha Tudor, 1915∼2008)는 미국 버몬트주에 10㏊에 달하는 땅에서 40여년간 정원을 가꾸며 살았던 자연주의 동화작가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천을 짜 옷을 만들고 염소를 키워 그 젖으로 요구르트를 만드는 등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던 정원사였다.

한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임지수 씨다.

전북 장수군에서 타샤 튜더처럼 자연주의 정원을 가꾸고 있는 임씨를 찾았다.

임씨는 작업실과 농원 등 모두 2곳에서 원예작업을 한다. 먼저 계남면에 있는 임씨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계남면의 작업실 [사진/성연재 기자]

계남면의 작업실 [사진/성연재 기자]

작업실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장계면 명덕리의 정원은 다음날 가보기로 했다.

임씨는 여전히 전문직 여성 같은 느낌을 줬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외벽이 징크로 마감된 건물 왼쪽에는 18㎡ 규모의 단아한 온실이 자리 잡고 있다. 갖가지 화초가 삽목(揷木,식물의 가지,줄기,잎 따위를 자르거나 꺾어 흙 속에 꽂아 뿌리 내리게 하는 일)돼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온실 안팎으로 삽목된 작물은 줄잡아 30종, 1만3천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작업실에는 때마침 인근 진안군에 귀촌해 정원을 가꾸고 있다는 한 여성이 찾아와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이웃이라고 한다.

임지수 씨가 삽목 작업이 된 작물에 물을 주고 있다.[사진/성연재 기자]

임지수 씨가 삽목 작업이 된 작물에 물을 주고 있다.[사진/성연재 기자]

◇ 광화문 탈출

임씨의 블로그 이름은 '광화문 탈출'이다. 임씨가 광화문을 떠난 것은 10여년 전이다.

경영은 순탄했고 회사는 잘나갔지만, 그는 오후 3시쯤만 되면 어김없이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증상을 겪었다. 몸은 점점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지쳐갔고,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불면의 밤이 늘어나고 초췌한 얼굴로 출근하는 일이 잦아지자, 그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북한산을 다니거나 조경수 전지를 배우는 등 자연과 접하며 은퇴 후에는 자연의 품에서 생활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은퇴 시기를 앞당겨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가족들에게 '독립'을 선언했다. 혼자 거처를 산골로 옮기겠다고 통보했다.

남편을 비롯해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임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루 해가 드는 좋은 땅을 고르기 위해 한겨울에 땅을 보러 다녔다.

등산화 한 켤레가 다 닳도록 주말마다 야산을 헤매고 다닌 끝에 전북 장수에 땅을 구했다. 열대야를 피하고자 해발 500m 이상의 토지를 찾았는데 때마침 그런 땅이 나타났다.

그는 "처음 봤을 때 바로 여기다"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장계면 명덕리 정원의 생태 화장실 [사진/성연재 기자]

장계면 명덕리 정원의 생태 화장실 [사진/성연재 기자]

이후 회사를 정리하고 내려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야산에 컨테이너 한 동을 갖다두고 그곳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생태 화장실도 꾸몄다. 생태 화장실에서 나온 거름은 농장 주변 화초와 나무를 기르는 데 중요한 영양분이 됐다.

그는 2014년 1천800만원을 주고 계남면의 한 촌집을 사들여 리모델링한 뒤 살고 있다. 깔끔하게 수리된 집은 임씨 혼자 지내기에 부담이 없어 보였다.

◇ 'Farm 나무와 풀'

정원 일을 시작할 때는 잡초부터 제거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풀을 키우는 일이었다. 땅이 비옥하지 않은 마사토였기 때문이다.

진돗개 한 마리와 임도를 살펴보는 임씨 [사진/성연재 기자]

진돗개 한 마리와 임도를 살펴보는 임씨 [사진/성연재 기자]

그래서 그가 가꾼 정원의 이름은 'Farm 나무와 풀'이다. 그는 잡초와 야생화가 어우러져 살아가도록 한다. 큰 간섭을 하지 않는다.

다만 꽃을 심어야 할 곳은 잡초를 예초기로 날린 뒤 땅이 비옥해지면 꽃씨를 뿌린다.

임씨는 이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사과나무 350주와 조경수 묘목 2천주를 심었다. 여러 해 정성껏 키운 나무들은 이후 정원 운용에 필요한 자금 문제를 해결해 줬다.

컨테이너 오두막밖에 없던 정원에 그는 함석지붕을 한 야외 식당을 하나 열었다. 2층은 원두막 형식으로 하고, 1층에는 주방을 뒀다. 비가 올 때면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요리를 할 수 있다.

또 하나 그가 자연을 즐기는 방법은 노천탕에서의 목욕이다. 이를 위해 빨간색과 노란색, 파란색 타일로 샤워실을 만들고 야외 욕조를 들였다. 새벽 5시부터 일을 해야 하는 농사철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이곳에서 몸을 식힌다.

하늘에서 본 임씨의 원두막 겸 식당 [사진/성연재 기자]

하늘에서 본 임씨의 원두막 겸 식당 [사진/성연재 기자]

임씨의 정원은 매력이 많다.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니 임씨가 한마디 던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면 제가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하잖아요? 전 그게 싫어서 광화문을 탈출한 거예요."

조금 덜 써도 굶을 일이 없으므로 더 벌면서 힘겹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방법에 대해 어쭙잖은 조언을 해 주려던 필자는 머쓱해졌다.

그는 현재 블로그를 통해 찾아온 팬들과만 소통하며 정원을 공개하고 있다.

◇ 자연주의 정원과 잡초 제거

임지수 씨 정원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임지수 씨 정원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새벽부터 정원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임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원 앞에서 차박을 했다. 정원에서 보는 일출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직 어둑한 시간, 카메라를 챙겨 정원으로 올라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컨테이너 하우스 옆의 넓은 잔디밭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아래쪽 마을을 배경으로 떠오른 해가 정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목가적 풍경 속에 정원을 지키는 진돗개와 새끼 몇 마리가 폴짝거리며 뛰노는 모습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시골 정원의 여유를 즐기고 있노라니 곧 임씨가 출근했다. 깔끔하고 단아한 도시 여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수십 년간 도시에서 CEO로 일했던 티는 벗을 수 없나 보다.

마침 출출해질 무렵, 임씨가 조식 바구니를 건넸다. 고구마 몇 개와 우유지만, 눈부신 가을 햇살이 반짝이는 정원에서 '왕후의 조식'을 즐겼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정원에 차려진 소박한 조식 [사진/성연재 기자]

정원에 차려진 소박한 조식 [사진/성연재 기자]

곧이어 임씨와 함께 임도 나들이에 나섰다. 임씨는 낫 하나를 챙겨 산으로 향했다. 임도 주변을 뒤덮은 칡덩굴 제거용이었다. 사정없이 낫으로 칡의 뇌두를 잘라내는 손놀림은 전문가다웠다.

한동안 잡초를 제거한 그는 꽃무릇과 국화가 피어있는 정원으로 내려갔다. 역시 잡초 제거가 가장 큰 일과였다.

그는 "어떤 때는 하루 열 시간 동안 잡초를 제거한 적도 있다"고 했다.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만한 경사가 진 임씨의 정원에선 멀리 명덕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마을을 정면으로 보면서 왼쪽에는 컨테이너 오두막과 욕실, 원두막이 있고,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수령 10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이 버티고 있다.

정원에서 지칭개 꽃을 바라보는 임씨 [사진/성연재 기자]

정원에서 지칭개 꽃을 바라보는 임씨 [사진/성연재 기자]

그 밑에는 그늘에서도 잘 클 수 있는 화훼들을 심었다. 지금 정원엔 꽃무릇과 구절초가 한창이다. 임씨는 여기서도 낫을 들고 틈만 나면 잡초를 잘라낸다.

흥미로웠던 건 커다란 연못이었다. 축구장 절반 크기의 연못이 자연 친화적으로 가꿔져 있었다. 진돗개 한 마리가 내려가 물을 먹는 모습도 정겨운 풍경이다.

"연못에 물을 좀 더 채우면 어떠냐"는 말에 임씨는 "물이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다"고 했다.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이젠 알 것 같았다.

정원 뒤 야산에서 발견한 영지버섯과 햇밤 [사진/성연재 기자]

정원 뒤 야산에서 발견한 영지버섯과 햇밤 [사진/성연재 기자]

◇ 엄마도 꿈꿀 권리가 있다

임씨는 2018년 10년 동안의 전원생활 경험을 담은 책 '엄마도 꿈꿀 권리가 있다'를 펴냈다. 반응은 뜨거웠다. 여성 혼자 시골로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스토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임씨가 강조하는 건 단순한 성공 자체보다는 고된 노동을 견디며 그가 얻은 마음의 평화다. 책에는 그 과정이 곳곳에 나와 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새벽 창가에 여명이 비추면 아침이 오고 있다는 설렘에 행복한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아침이 오는 것을 이렇게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 나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구나 싶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어느 누구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의 여유는 얼마나 자유로운 경험인지 모른다" - 임지수 '엄마도 꿈꿀 권리가 있다' 중에서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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