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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슬람교] ③무슬림, 신라 시대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송고시간2020-10-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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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따라서 온 이슬람 상인들, '풍요의 땅' 신라에 정착

고려 시대에 수만 명 거주 추정…조선 시대 궁궐 의식 참여하기도

70∼80년대 중동 건설 현장 다녀왔다가 입교한 사람 많아…"꾸준한 증가세"

한국의 "이슬람교" / 연합뉴스 (Yonha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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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N6sNoK5LGw

(서울=연합뉴스) 탐사보도팀 = 아랍의 향료와 페르시아산 유리 제품 등을 가득 싣고 도착한 아랍 상인들은 신라에 매료됐다. 이들은 평소처럼 당나라 광저우의 무슬림 '번방(蕃坊·외국인 거류지)'에 머물다가 계절풍이 바뀔 때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상인들이 말하는 신비의 나라 '알 신라(al-shilla)'의 이야기에 이끌려 신라로 왔다. 이들이 두 눈으로 직접 본 신라는 과연 무슬림이 한번 방문하면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할 법했다.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그리고 금붙이를 가득 매단 신라인들의 풍요로운 모습. 이들은 신라를 떠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슬림들이 신라에 반해 영구 정착하는 일은 빈번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846년 이슬람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가 작성한 '왕국과 도로총람'에는 무슬림의 한반도 정착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이 등장한다. 그는 신라를 "금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쾌적해 무슬림들이 한번 도착하면 떠날 생각을 않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당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슬람 제국의 바그다드를 거쳐 당나라 장안까지 이어진 국제 교역망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었다. 광저우, 항저우 등에 집단 거주하던 무슬림 상인들은 항저우에서 일주일 남짓이면 도착하는 신라를 안방 드나들듯 찾았다. 일부는 신라에 터를 잡고 살며 당나라와 무역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늘날 한국인 무슬림 6만 명을 포함해 모두 26만 명에 이르는 국내 무슬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무슬림의 역사는 1천200여 년에 달하는 셈이다.

신라왕경 복원도
신라왕경 복원도

[경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무슬림 상인들, 실크로드 동쪽 끝 '풍요의 땅' 신라 찾았다가 눌러앉아

신라 38대 왕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왕릉인 '괘릉(掛陵)'에는 특이한 석상 하나가 묘역을 지키고 있다. 바로 서역인(서아시아인)의 모습을 한 무인(武人)상이다.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얼굴 형태, 가지런히 다듬은 턱수염과 이슬람식 예배 모자 등의 모습을 보고 많은 전문가가 이 석상의 주인공을 이슬람권 외국인으로 지목했다. 신라인들이 조각한 무인상의 섬세한 묘사로 미뤄 볼 때 무슬림들은 8세기 무렵 이미 신라 내에 집단 거주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신라 시대에 조성된 고분이나 사찰 등에서 발견되는 아라비아·페르시아산 공예품이나 장식품, 고분에서 출토되는 중앙·서아시아인들의 특징을 가진 토용(土俑)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

874년 당나라에서 발생해 10년간 이어진 농민반란 '황소의 난'이 절정에 이른 시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의 존재도 무슬림들의 집단 거주를 추측하게 한다. 처용은 개운포(울산)를 찾은 왕 앞에 바다 건너에서 나타났다. 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했지만, 아내의 아름다움을 탐해 사람으로 변장한 역신(疫神)이 아내를 범한 모습을 보고 만다. 이를 본 처용은 '처용가'와 '처용무'라는 노래와 춤을 지어 태연히 역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처용무에 쓰이는 가면은 붉거나 검은 얼굴, 큰 매부리코 등이 특징으로 서아시아인에 가까운 얼굴이다.

처용무에 쓰이는 가면
처용무에 쓰이는 가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황소의 난이 일어날 당시 광저우, 항저우 등에는 아랍과 페르시아 등에서 온 무슬림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12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학살당했는데, 학살을 피해 많은 무슬림들이 도망쳤다고 한다. 중국 내륙의 소수민족 '회족(回族)'은 당시 도망쳤던 무슬림들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삼국사기에도 이 시기에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동해안에 나타나 왕의 수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학계에서는 처용이 황소의 난을 피해 탈출한 무슬림 상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처용이 아랍 상인임을 특정하는 기록은 없지만, 처용의 등장 당시 황소의 난으로 인한 대학살과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던 중국의 사정, 무슬림 상인들이 신라를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던 점 등을 고려해볼 때 처용이 무슬림 상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사료에도 무슬림들이 신라에 집단 거주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신라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한 이븐 쿠르다드비를 비롯해 모두 9명의 무슬림 학자가 무슬림의 한반도 정착을 언급한 저술을 남겼다. 무슬림 역사학자 마수디는 10세기 무렵 "이라크인과 다른 외국인들이 신라를 조국으로 삼아 정착했다"며 신라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출신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저서를 남겼다. 페르시아의 이븐 루스타는 903년 저서 '진귀품 목록'에서 "금이 풍부한 신라라는 나라가 있으며, 그곳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썼다.

이슬람 역사학자 샴수딘 디마쉬끼는 이슬람 시아파의 한 종파인 알라위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7∼8세기경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북한 개성역사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북한 개성역사지구

[연합뉴스 자료사진]

◇ 고려 시대 한반도로 대거 유입…조선 초기 이후 '집단 정체성' 잃어

"만둣가게에 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무슬림)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고려 시대 민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가사다. 한반도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교류는 신라 시대부터 있었지만, 우리 기록에 무슬림이 직접 등장한 시기는 고려 시대인 11세기에 이르러서다. '고려사'에는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온 100여 명 규모의 사절단이 향료, 약재, 수은 등을 싣고 고려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 조정은 이들에게 객사를 마련해주고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고려에 머무는 동안 왕실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번영을 비는 공식 행사 등에 참석해 이슬람식 축도를 했다.

고려가 13세기 원나라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후에는 원나라의 무슬림들이 한반도로 대거 유입됐다. 당시 무슬림들은 원나라에서 행정, 경제, 문화 등의 기술관료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원나라 지배층을 돕기 위한 관리나 역관, 무관 등의 수행원 신분으로 고려에 꾸준히 유입됐다. 고려에 귀화해 정착한 무슬림들도 많았다.

이 시기 무슬림의 유입 경로를 잘 보여주는 예가 13세기 원나라 출신인 충렬왕비의 시종 무관으로 고려에 들어온 장순룡이다. 위구르족 무슬림인 그는 충렬왕으로부터 고려 이름을 받았고, 고려 여인과 결혼해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됐다.

고려 내 무슬림은 꾸준히 성장해 13세기 말부터는 수도 개경 인근의 벽란도 일대에 집단 거주지를 이룰 정도였다. 이 공동체의 규모는 최소 4만 명에서 7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조선 건국 이후인 1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종교, 언어를 유지했다.

세종대왕 즉위식 재현행사
세종대왕 즉위식 재현행사

(서울=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열린 세종대왕 즉위 의식 재현행사에서 세종대왕이 문무백관 등과 함께 근정전으로 입장하고 있다. 1997.10.18 [본사 자료사진]

고려와 원나라의 멸망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의 건국에 따라 한반도 내 무슬림 관료 세력은 힘을 잃었지만, 조선 초기 무슬림들은 일반 백성보다는 높은 지위를 누리고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세종 즉위식 등 각종 공식, 비공식 의식에 초청됐다. 궁궐에서 코란(이슬람교 경전)을 낭송하며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번영을 축원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0년 무슬림 상인과 종교 지도자 등이 궁궐에 들어와 세종에게 재물을 바치고 연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국가로부터 주택과 직책, 월급 등을 받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이슬람이 유교 문화와 큰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이희수 교수는 "조선 건국 초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조정은 고려의 효과적 통치를 도왔던 무슬림 기술관료의 지혜와 과학적 지식이 필요해 이들에게 일정한 지위를 보장했다"며 "덕수 장씨 출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장유가 사후 영의정에 봉해지는 등 무슬림의 후손들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유교 문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조선 사회가 보수화하면서 무슬림들도 점차 설 땅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1427년 이슬람식 예배와 코란 낭송을 못마땅해한 사대부들이 세종에게 이를 금지할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른다.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이슬람식 예배와 전통복장 등을 금지했다. 이후 50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무슬림의 집단 정체성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

[촬영 진가영 인턴기자]

◇ 70∼80년대 중동 건설 붐 후 입교자 늘어…꾸준한 증가세 유지

한반도에서 명맥이 끊겼던 이슬람교가 다시 한국 사회에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2만2천여 명을 파병했다. 1966년까지 한국에 주둔한 터키군은 1955년부터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슬람 강연을 열거나, 1956년 이문동에 임시 모스크를 건립하는 등 종교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터키에 대한 호감을 갖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른바 '1세대 한국인 무슬림'이 나타났다.

1960년대부터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의 지원과 협력이 이어졌고, 1967년에는 한국이슬람중앙회(KMF)의 전신인 한국이슬람협회가 결성됐다.

'오일 쇼크' 이후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이어진 중동 건설 붐은 한국인 무슬림 공동체의 기초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한때 2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 노동자가 중동으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이슬람을 접한 한국인 노동자 중 이슬람에 입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당시 입교자 중 상당수가 오늘날 한국 이슬람교의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중동과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커진 한국 정부는 중동과의 관계를 고려해 모스크 건립을 지원했고, 이에 1976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최초의 모스크가 세워졌다.

한국의 이슬람교는 1990년대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알음알음으로 소규모로 명맥을 잇던 무슬림 공동체가 급격히 성장하기에 이른다.

1964년 3천여명 남짓에 불과했던 한국의 무슬림 수는 현재 한국인 무슬림 6만 명과 외국인 무슬림 20만 명 등 26만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한국이슬람중앙회도 16개 모스크와 80여 개 무쌀라(예배원)를 산하에 두고 있다. 꾸준한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는 무슬림 인구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다양해지면서 더욱 늘 것으로 보인다.

이수정 아시아연구소 서아시아센터 공동연구원은 "한국의 이슬람교는 외국인 노동자의 대거 유입과 자생적 무슬림의 등장 등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급격한 변화의 시작점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에서 발생했던 문제점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들을 한국 사회가 감싸 안게 됐을 때 발생할 문제들을 예측하고,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65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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