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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빈 땅'인 대봉감밭에 가질 않는 아비는 그저 웃는다

송고시간2020-10-2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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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냉해에 "99% 나무에 대봉감 열리지 않았다"

6차 산업 꿈에 쉼표 찍은 농부는 일손 놓고 한숨

감이 열리지 않은 감나무
감이 열리지 않은 감나무

(영암=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28일 오전 대봉감 주산지인 전남 영암군 금정면의 한 감나무밭에서 농부가 열매가 몇 개 열리지 않는 감나무를 살피고 있다. 2020.10.28

(영암=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아빠, 요즘은 왜 감밭에 안 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가더니만…."

10여 년 전 고향으로 내려올 당시 초등생이었던 딸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됐다.

철든 딸은 아빠가 걱정돼 짐짓 모른 채 아버지의 마음을 물음 하나를 던지며 살핀다.

"왜긴 왜것냐, 감이 열었어야 감밭도 가지 빈 땅에서 뭘 하라고…."

아비는 딸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이유 없이 웃는다.

650ha의 면적에서 감을 키우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은 우리나라 단일면적으로는 대봉감 최대 재배지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가지가 빼곡하게 열린 대봉감의 무게를 못 이겨 바닥에 닿을 듯 늘어지곤 하지만, 올해는 대봉감이 맺힌 나무를 찾기가 오히려 힘들다.

올해는 봄철 이상고온과 냉해가 동시에 겹쳐 약 70~80% 수확량이 급감한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에는 무수히 열린 영암 대봉감
지난해에는 무수히 열린 영암 대봉감

[연합뉴스 자료사진]

자신을 '곶감에 미친 농부'라고 소개하는 박연현(57) 씨의 금정아천농장 약 3ha 대봉감밭은 사정이 더욱 심각했다.

"99% 나무에서 감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박씨는 올해 수확을 아예 포기했다.

박씨는 올해 냉해가 덮친 그때를 날짜와 요일까지 정확히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있었다.

4월 5일 일요일, 영하 6도의 추위가 영암군을 덮쳐 이틀간 이어졌다.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새순이 올해 초 이상고온으로 10여 일 빨리 나온데다, 까닭 모를 자연의 심술로 냉해가 덮치자, 연약한 새순은 썩어나갔다.

몸에 쌓인 넘치는 영양을 주체하지 못해 감나무는 이내 새순을 틔웠지만, 뒤늦게 나온 새순에서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올해 감 농사 흉작은 미리부터 예견됐지만,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고 박씨는 한숨 쉬었다.

박씨가 감 농사를 망친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수출업을 하다 교사를 하는 아내를 설득해 어린 딸과 아들을 품에 안고 2009년 귀향한 그였다.

고향 특산물인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들어보려고 시행착오를 무던히도 겪었다.

2015년에는 겨우내 깎아 말린 대봉감 곶감에 곰팡이가 피어 망했다.

2017년에는 대봉감 풍년에 가격이 폭락해 산지 폐기가 결정돼 멀쩡한 감을 트랙터로 깔아뭉개 폐기했다.

영암군 대봉감 산지폐기
영암군 대봉감 산지폐기

2017년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농사를 망칠 때마다 비어가는 쌀독에 어린 자식들이 걱정됐지만, 어디 하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다음 해 농사 전까지 끼니를 때울 요량으로 임시로 취직을 하기도 했지만, 첫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는 날 어김없이 전화 한 통이 왔다.

"전업농이 취업 활동하면 지원이 끊깁니다. 빨리 퇴사하세요."

올해 감 농사를 망친 박씨는 내년까지 버틸 길을 찾아야 한다.

과거와 달리 6차산업으로 지난해 가공해 놓은 대봉감 곶감이 아직 재고가 남아 당분간은 버틸 만하다.

그러나 올해 수확량이 없으니 당장 내년이 걱정이다.

박씨는 "모두 말리는 곶감 개발과 판로 개척에 힘써 지역 백화점 납품도 시작했는데, 냉해가 발목 잡았다"며 "농산물 재해보험에 가입한 농가도 보상을 30% 수준밖에 받을 수 없어 모두 막막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빚내서 살고, 일거리를 찾아서 하다 보면 내년이 오겠거니 한다"며 "자연이 하는 일을 인간이 어쩔 수 없으니, 상황이 이래도 그저 웃으며 넘기는 게 농사일이다"고 말했다.

내년 냉해에 대비해 감나무 밑에 피울 왕겨를 구해 창고에 쌓은 박씨는 귀농귀촌학교 후배들에게 '쉽지 않은 농촌 생활'을 증언하기 위해 진흙이 묻은 화물차 운전석에 몸을 다시 밀어 넣었다.

지난해 생산한 대봉감 곶감
지난해 생산한 대봉감 곶감

(영암=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28일 오전 대봉감 주산지인 전남 영암군 금정면에서 한 농부가 지난해 생산한 곶감을 보여주고 있다. 영암군 대봉감 농가들은 올해 냉해로 70~80% 수확량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0.10.28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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