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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 사라지는 Pub과 실비집

송고시간2020-10-3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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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의 사랑방 'PUB'(펍)
영국인의 사랑방 'PUB'(펍)

EPA/CHRISTOPHE PETIT TESSON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편하게 건네는 "만나서 밥 한번 먹자"가 한국인들의 교제 패턴이다. 간혹 한국을 방문하는 나 또한 이런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때마다 지인들은 그럴싸한 곳을 고집한다.

나는 편안한 실비집, 구수한 막걸리가 나오는 소박한 밥집, 소주잔이 오가는 포장마차 같은 곳이 좋은데 말이다. 갑남을녀들의 왁자지껄한 일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실비집을 '한국인의 사랑방'으로 부르고 싶다. 그런데 이런 집을 찾는 일이 해가 갈수록 어려워져 마음이 무겁다.

영국 또한 마찬가지다. 영국인이 자랑해 마지 않는, 그래서 영국문화를 얘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영국인의 사랑방 'PUB'(펍)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엔 영국과 웨일스에서만 473개의 펍이 문을 닫았고, 올해는 9월까지 315개의 펍이 문을 닫았다. 이제 영국과 웨일스엔 4만여 개의 펍만 남았다.

이런 추세라면 개인이 운영하는 펍은 대부분 사라질 듯하다. 영세업자라고 할 수 있는 개인 소유 펍의 지난 10년간 폐업 추세는 매년 25%에 육박한다.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사회에서 음식의 역할을 살피는 필자의 마음은 무척 무겁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아주 절박하게 말이다.

첫째, 영국의 펍은 단순히 술과 음식을 팔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만이 아니다. 그럼 그 외에 무엇이 더 있단 말인가? 먼저 펍은 '영국인의 사랑방'이라는 진부한 얘기부터 해본다.

사랑방은 사람들이 모여 정을 나누는 장소다. 18세기에 'Public House'란 말이 처음 사용될 무렵, 기존의 'Tavern' 'Alehouse' 'Beer House' 등 모든 형태의 맥줏집을 아울러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Public House'에 가장 알맞은 한국어로, 지금까지 많이 사용한 '선술집'보다 '우리 모두의 집'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영국 펍에는 돈 한 푼 없이 들어가 책을 읽든, 신문을 보든 아무도 딴지 걸지 않는다. '내 집' '우리 모두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펍에는 서로 부대끼며 정을 나누는 이벤트가 아주 많다. 영국 펍이 유구한 전통으로 자랑하는 메뉴 'Sunday Roast'는 온 동네 사람이 모여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일요일 마을 잔치'다. 영국의 모든 펍이 실내보다 서너 배 더 큰 뒷마당을 가진 이유도 애들이 뛰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는 개인의 사생활을 무척 중시한다. "my house is my castle"(나의 집은 나의 성)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개인 영역에 대한 존중이 철저한 사회에서 하나의 공동체 문화로 향하는 출구가 펍이다.

둘째, 영국의 펍은 '제2의 국회의사당' '또 다른 하원'이라는 말도 유명하다. 이 말대로라면 영국엔 수많은 국회의사당이 전국 방방곡곡에 있다. 펍에 모인 사람들은 주요 정책이나 필요한 관심사에 대해 열심히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데, 이는 중지를 모으는 과정이다. 그래서 영국 정치인들은 민심을 살피고 싶을 때 펍을 찾아간다.

영국의 펍 간판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동물·농기구·꽃·왕 등 사람들에게 친숙한 게 많다. 1393년 국왕 리처드 2세가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펍을 이용할 수 있도록 왕명으로 하달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펍은 오래전부터 모든 사람이 낮은 문턱을 넘어와 다양한 얘기를 활발히 논의하는 장소다.

셋째, 펍은 '영국의 심장'이다. 심장은 중요한 장기다. 심장이 박동하지 못하는 순간 생명은 끝난다. 펍은 영국이라는 나라에 피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역사 속에서 수행했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여부를 펍이 결정한다고 해도 될 정도다.

이런 점에서 펍은 영국인의 삶 자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의 펍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엄청난 폭격 속에서도 문을 열었다. 영국에서 "펍과 왕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난 배경이다.

하지만 현재 추세라면 이제는 바뀔지 모른다. 최근에는 250년 전통의 펍이 문을 닫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펍의 퇴거는 영국의 심장이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과 진배없다. 펍이 없어지면 영국은 죽은 나라가 될 것이란 말이어서 영국인의 화들짝 놀란 가슴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한국의 실비집과 영국의 펍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걱정 없이 들어갈 수 있고, 모두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어떤 주제든 열린 마음으로 얘기하는 것은 한국의 실비집에선 어렵다.

한국은 아는 사람 중심의 문화여서 낯선 사람과 말을 잘 섞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인은 토의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대화할 때 차가운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을 더 앞세우기도 한다.

그런데도 영국의 펍과 한국의 실비집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꾸준히 존재하며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사라져가는 펍과 점점 찾기 힘들어지는 실비집이 더 소중하게 보인다.

정갑식
정갑식

영국 Oxfordbrookes 대학에서 박사과정 수학하고, 런던에서 Dinning, Eating out Trend 분석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Fashionfood21 Ltd 대표
gsjeu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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