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연합뉴스 최신기사
뉴스 검색어 입력 양식

[특파원 시선] 램지어는 '매춘계약'이라는데…"실은 100% 강제동원"

송고시간2021-03-14 07:00

beta
세 줄 요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계약 관계의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에 미국의 역사학자들을 필두로 학계의 반박과 비판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히 영어로 고발한 서적이 공개될 예정이어서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 시도에 쐐기를 박을지 주목된다.

오는 26일 '한국의 위안부: 군 위안소, 잔혹성, 그리고 배상운동'을 출간하는 민병갑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교수는 13일(현지시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 103명 중 93%가 당시 미성년자"라며 "21세 미만 미성년자를 데려간 것 자체가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요약 정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줄인 '세 줄 요약' 기술을 사용합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사 본문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제공 = 연합뉴스&이스트에이드®
이 뉴스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본문 글자 크기 조정

뉴욕시립대 민병갑 교수 영문서적 곧 발간…103명 분석결과 93% 미성년

"4명은 자원이나 이동중 폭력 감안시 전원 강제동원…책 쓰며 매일 울어"

뉴욕시립대 민병갑 교수의 영문저서 '한국의 위안부: 군 위안소, 잔혹성, 배상운동'
뉴욕시립대 민병갑 교수의 영문저서 '한국의 위안부: 군 위안소, 잔혹성, 배상운동'

(뉴욕=연합뉴스) 강건택 특파원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계약 관계의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에 미국의 역사학자들을 필두로 학계의 반박과 비판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버드대 교내 신문에 그치던 언론의 관심도 뉴욕타임스, AP통신, CNN방송, 가디언 등 세계 유력 매체로 확산하며 여론의 압박 강도를 더했다.

그런데도 아직 램지어 교수가 주장을 철회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명백한 오류를 시인했다는 전언이 나왔지만, 자신의 글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반박 논문을 읽으면서 재반론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히 영어로 고발한 서적이 공개될 예정이어서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 시도에 쐐기를 박을지 주목된다.

오는 26일 '한국의 위안부: 군 위안소, 잔혹성, 그리고 배상운동'을 출간하는 민병갑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교수는 13일(현지시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 103명 중 93%가 당시 미성년자"라며 "21세 미만 미성년자를 데려간 것 자체가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민 교수는 옛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위안부 증언집과 본인이 직접 인터뷰한 할머니 22명의 증언을 토대로 이같이 분석했다.

그는 "강제동원이냐 아니냐가 핵심 이슈"라면서 "103명 중 자원해서 간 경우는 4명뿐이고 부모나 친척이 팔아넘긴 사례가 18명이며, 나머지는 납치나 취업사기"라고 지적했다.

자원자나 가족에 의한 매매 사례가 일부 있지만, 동원 과정의 강압성을 고려하면 100% 강제동원이라는 게 민 교수의 판단이다. 기차, 선박을 통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성폭행당하고 폭력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점에서다.

민 교수는 "피해 할머니 한 분의 증언을 보면 중국에 들어간 뒤 산등성이에서 기차가 갑자기 서고 군인들이 데려가 강간했다고 한다"며 "반항하니까 몸 전체가 피범벅이 되도록 때렸고, 도망가려던 2명은 총에 맞아 죽었다"고 전했다.

도망가거나 자살하지 못하도록 손을 꺾고 묶어놔 장애가 생긴 피해자들도 많았으나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증언도 책이 담겼다.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민병갑 교수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민병갑 교수

[뉴욕시립대 홈페이지 캡처]

민 교수는 "취업사기든 뭐든 가는 도중에 전부 다 강압을 받았기 때문에 강제동원이라고 볼 수 있다"며 "중국, 동남아와 달리 한국 위안부는 강제동원 기록이 없다는 게 일본 주장인데 중요한 건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군 장교들이 토한 것을 핥아먹으라고 시키고, 임신 말기까지 부려 먹다가 살해하기도 했다"며 "책을 쓰면서 그분들의 고통에 매일 울었다"고 술회했다.

'매춘부'라는 램지어 교수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 금전적 대가를 받은 위안부 피해자는 103명 중 8명에 불과했다고 민 교수는 전했다.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요령이 생기거나, 일반 위안소가 아닌 '장교 클럽'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경우에 국한된 사례다. 그마저도 받아야 할 돈의 일부만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전에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도 이 저서를 통해 밝혀졌다.

1993년 뉴욕을 방문한 황금주 할머니의 통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와 세 차례 인터뷰한 민 교수는 "황 할머니가 1970년대 초반 충북 보은·옥천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행사에서 육영수 여사에게 '내가 식민지 시대에 위안소에 끌려가서 당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육 여사는 황 할머니에게 저쪽으로 가시자고 한 뒤 '절대 입을 열면 안 된다. 평화로운 때가 오면 다 알려지게 되니 지금은 이야기하지 마시라'고 했다고 한다"고 민 교수는 전했다.

이 밖에 위안부 피해자 이남님 할머니의 1982년 잡지 기고가 공개됐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한 지방지도 1991년 이전 피해자의 증언을 들었으나 기사를 쓰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firstcircle@yna.co.kr

댓글쓰기
에디터스 픽Editor's Picks

영상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