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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

송고시간2021-08-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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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봉환 속 "참변 가담해 反공산주의 계열 독립군 학살" 주장 나와

"홍 장군, 독립군 신속한 통합에 관심"…'참변 가담' 기록 없어

참변 후 군사재판 참여 두고 왜곡 주장…'독립군 궤멸' 주장도 과장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천안=연합뉴스) 독립기념관은 서거 후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1868∼1943년)의 생전 미공개 영상과 사진 등 16점을 17일 공개했다. 사진은 1922년 1월 홍범도 장군의 모습. 2021.8.17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송환되면서 일부 보수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홍 장군이 독립군이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1921년 독립군 간 주도권 다툼으로 벌어진 자유시 참변에 홍 장군이 가담해 같은 독립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자유시 참변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 소재 스보보드니(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이 세력간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일으킨 사건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주된 해석이다.

유해 봉환을 비판하는 측은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극동공화국 군대와 함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계열의 독립군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묵념하는 문재인 대통령
묵념하는 문재인 대통령

(대전=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2021.8.18

◇ 자유시 참변 원인은 이념 대립 아닌 독립군간 주도권 경쟁

홍 장군에게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우선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 일제의 독립군 탄압이 거세지자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상당수 독립군 부대가 1921년 1∼3월 자유시에 모여 독립군 통합을 논의했다.

일제와 적대관계인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겠다는 의도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보면 이때 모인 독립군 수가 2천∼2천300명 정도였다.

통합 논의 초기에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局)이 지원한 대한의용군이 통합 주도권을 쥐었으나, 1921년 4월 '극동지역 볼셰비키 혁명사업'이 러시아공산당에서 코민테른으로 이관되면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후 통합 조건을 두고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이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1921년 6월 28일 더는 독립군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 치안유지 명목 등으로 대한의용군을 강제로 무장해제 시키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주도권을 쥔 고려혁명군 주력부대인 오하묵, 최고려 등이 이끄는 한인자유보병대대가 극동공화국 군대와 함께 대한의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자료는 없다.

즉 자유시 참변이 독립군 간 주도권 경쟁이 원인이 돼 벌어진 참사는 맞지만,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계열의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은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이거나, 적어도 러시아 공산당 또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가려는 독립군이었고 참변의 원인도 이념 대립이 아닌 독립군 주도권 다툼이었던 것이다.

독립군 연구의 대가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일 연합뉴스에 "당시 국제정세상 독립군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가려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했고 그래서 많은 독립군이 자유시에 모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복잡하게 얽힌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왜곡된 주장(이념 대립)으로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자유시 참변 현장인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
자유시 참변 현장인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

[연합뉴스 자료사진]

◇ 홍 장군 자유시 참변 가담 기록 전혀 없어…"참변에 통곡" 증언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 과정에서 고려혁명군 편에서 대한의용군 소속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도 낭설에 가깝다.

1921년 3월께 자유시에 도착한 홍 장군은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었다.

양측 모두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홍 장군으로서는 통합 주도권의 향방엔 관심이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돼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공식 사료에도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기록은 있지만, 이는 신속한 사태수습을 원한 고려혁명군 측이 독립군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홍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추대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자유시 참변 연구 권위자인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에 "홍 장군이 고려혁명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하고, 참변 이후 벌어진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왜곡된 주장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다"고 설명했다.

홍범도 장군 생전모습 담은 영상 첫 공개
홍범도 장군 생전모습 담은 영상 첫 공개

(천안=연합뉴스) 독립기념관이 17일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기념으로 미공개 영상 자료 기증식을 열었다.
사진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대회인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촬영 영상 속 홍범도(왼쪽)·최진동 장군. 2021.8.17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궤멸했나

보수성향 커뮤니티들에선 또 자유시 참변으로 자유시에 모였던 2천여명의 독립군 중 700∼800명이 사망해 사실상 독립군이 궤멸했다는 주장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보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론 사망자가 36명,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총 600여명이다.

또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소속 군인이 864명이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사망자가 700∼800명이라는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대한의용군 병력이 1천명 내외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윤상원 교수는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고려혁명군 중심으로 모인 독립군이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다"면서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립군이 궤멸한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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