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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사망] 6·29 선언과 6共의 탄생…한국정치 뒤흔든 3당 합당

송고시간2021-10-2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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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줄 요약

26일 세상을 떠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과 6공화국 성립 과정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여러 쪽을 장식하고도 남을 만큼 드라마틱한 여러 장면을 보여준다.

대통령 7년 단임 막바지로 치닫던 전두환 5공 정권은 체육관에서 '거수기' 투표로 뽑던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호헌을 주장했다가, 거센 국민의 저항 앞에 무릎을 꿇고 쿠데타 2인자이자 육사 11기 동기이던 노 전 대통령을 통해 1987년 6월 이른바 6·29 선언을 내놓는다.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고자 1987년 6월 29일 발표한 6·29 선언은 ▲ 대통령 직선제 개헌 ▲ 김대중 사면 복권 및 시국 관련 사범 석방 ▲ 언론기본법 개폐 ▲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등이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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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고상민 기자 = 26일 세상을 떠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과 6공화국 성립 과정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여러 쪽을 장식하고도 남을 만큼 드라마틱한 여러 장면을 보여준다.

대통령 7년 단임 막바지로 치닫던 전두환 5공 정권은 체육관에서 '거수기' 투표로 뽑던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호헌을 주장했다가, 거센 국민의 저항 앞에 무릎을 꿇고 쿠데타 2인자이자 육사 11기 동기이던 노 전 대통령을 통해 1987년 6월 이른바 6·29 선언을 내놓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 1981년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으로 대통령에 뽑혔다. 7년 임기를 마감하는 가운데 1987년 당시 신군부가 주도하는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했다.

그러나 그해 '호헌철폐·독재타도' 구호 아래 직선제 개헌을 앞세워 들불처럼 일었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고자 1987년 6월 29일 발표한 6·29 선언은 ▲ 대통령 직선제 개헌 ▲ 김대중 사면 복권 및 시국 관련 사범 석방 ▲ 언론기본법 개폐 ▲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등이 골자였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 선언은 애초 전 전 대통령이 아이디어를 냈고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노 전 대통령이 이를 고심 끝에 수용한 뒤 오히려 요구를 추가하여 자신만의 '결단'인 양 인식되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먼저 전향적 제안을 하고 전두환이 불가피하게 수용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한국 대통령중심제의 근본을 뒤집어놓은 6·29 선언으로 그해 10월 '대통령 직선·5년 단임'의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공포되어 5공이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야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끝내 무산되면서 민정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 결과 1988년 제6공화국으로 불리는 민정당 노태우정권이 출범했다.

대통령 취임 선서하는 노태우
대통령 취임 선서하는 노태우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8년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그해 치러진 13대 총선(1988년 4월 26일)의 결과는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여소야대 구도를 등에 업은 야권을 중심으로 5공 정치권력형 비리를 조사하기 위한 '5공비리특위'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5·18 광주특위'가 13대 국회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중심의 민정당과 야당이던 김영삼 중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중심의 신민주공화당 등 3개 정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출범하면서 국회는 여대야소로 급변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소수 야당으로 고립됐다.

민자당은 노 전 대통령이 총재를, 김영삼·김종필·박태준 등 3인이 대표위원을 맡으며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 가운데 공천과 당직 문제를 둘러싼 계파 갈등에 끊임없이 몸살을 앓아야 했다.

결국 민자당은 그다음 14대 총선(1992년 3월 24일)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또 3당 합당은 지역주의를 심화하고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사기도 했다.

3당 합당 발표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3당 합당 발표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모습.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노 전 대통령은 앞서 대선 후보시절인 1987년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 직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몸을 낮춰 당선됐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에는 계엄 상황에 대비해 반(反)정부 인사목록을 만들어 당시 국군보안사령부로 하여금 사찰하게 하고, 유사시 전원 검거한다는 '청명계획'을 세웠다. 이후 1990년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실이 밝혀져 역풍을 맞았다.

또한 재임 시절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해 1천500여명의 교사를 무더기로 파면·해임해 학생 운동권의 시위를 촉발하기로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비민주적 행보는 군인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과 맞물려 노태우정권이 군부독재의 연장선이라는 평가를 받는 근거가 됐다.

gorious@yna.co.kr

유튜브로 보기

https://youtu.be/71t26Ip7-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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