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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어떻게 넘겼나…"미·소, 핵전쟁 공포"

송고시간2022-06-3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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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징후와 함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결단만 남았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각국이 위험한 핵전쟁의 문턱을 낮추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소련 출신 우크라이나 역사학자인 세르히 플로히(65)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겸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은 신간 '핵전쟁 위기'에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뻔한 1962년 가을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 순간을 돌아보며 "미국과 소련 모두 핵전쟁을 두려워했다"고 분석한다.

허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위기 상황에서 국가지도자와 참모들의 치열한 토론과 냉정한 분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며 "양국이 충돌 직전에 자제력을 발휘하고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 출구를 모색한 노력이 결국은 핵전쟁을 막은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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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히 플로히 미 하버드대 우크라이나연구소장 '핵전쟁 위기' 출간

1961년 빈에서 만난 흐루쇼프(왼쪽)와 케네디
1961년 빈에서 만난 흐루쇼프(왼쪽)와 케네디

[삼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여러 차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변국에 경고했다. 최근엔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징후와 함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결단만 남았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각국이 위험한 핵전쟁의 문턱을 낮추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소련 출신 우크라이나 역사학자인 세르히 플로히(65)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겸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은 신간 '핵전쟁 위기'에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뻔한 1962년 가을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 순간을 돌아보며 "미국과 소련 모두 핵전쟁을 두려워했다"고 분석한다.

플로히 교수는 새롭게 발굴한 소련의 문서고 자료와 우크라이나에 보관 중인 옛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자료를 활용해 당시 크렘린의 의사 결정 과정, 소련의 미사일 전력 동원과 파견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바이든 정부 초기 미국에서 먼저 출간된 이 책의 번역은 허승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맡았다.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낸 허 교수는 플로히 교수의 전작 '알타: 8일간의 외교 전쟁'과 '체르노빌 히스토리'도 번역했다.

허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위기 상황에서 국가지도자와 참모들의 치열한 토론과 냉정한 분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며 "양국이 충돌 직전에 자제력을 발휘하고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 출구를 모색한 노력이 결국은 핵전쟁을 막은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한다.

1962년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1962년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삼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플로히 교수는 핵심 인물들과 관료들이 올바른 일을 한 순간을 포착하고 어떻게 맞는 결정을 내렸는지 밝히는 대신 그르친 수많은 상황을 언급한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역시 이념적 자만이 컸고 정치 의제에 있어 너무 앞서나갔으며, 상대의 전략 지정학적인 의도를 잘못 읽었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베를린을 둘러싼 핵 위기 우려로 진이 빠진 상태였다. 쿠바에 있는 소련군 숫자와 핵전력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바의 소련 미사일에 대한 공격을 제안했다. 반면 흐루쇼프는 케네디의 결연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충격을 받았고, 결국 주도권을 잃었다.

당초 소련은 쿠바에 4만4천 명의 장교와 병사를 파견하고, 1천300명의 민간인을 보내는 '아나디르' 작전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추진했다. 이 같은 대규모의 인력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무기와 장비, 보급품 수송도 이뤄졌는데, 준중거리미사일(MRBM)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핵탄두가 쿠바의 발사기지에 운송된 것도 뒤늦게 알았다.

소련의 R-12준중거리미사일
소련의 R-12준중거리미사일

[삼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플로히 교수는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정치적 배경, 이념적 관점, 통치 스타일 등을 비교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이라고 드러난 한 가지,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공유하고 있었다"며 "모두 핵무기를 두려워하고, 이것을 사용한다는 생각 자체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어 "케네디가 공습을 선호하는 주장을 펼쳤다면, 흐루쇼프는 전술핵무기를 사용하고 상황이 요구하면 전략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돼 있었다"며 "케네디가 온건한 노선을 취해 공습이나 침공 대신 봉쇄를 선택했기에 흐루쇼프는 전술핵무기 사용을 승인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강조한다.

이들을 비롯한 당시 세대가 1954년 미국의 캐슬 브라보 수소폭탄 실험과 1961년 소련의 차르 봄바 실험으로 핵폭탄의 파괴력을 경험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그늘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핵무기가 자국과 인류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플로히 교수는 각국이 무기 통제 조약들을 폐기하고 핵무기 경쟁에 나서는 현 상황을 언급하며 "핵무기 사용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지고 핵 대치는 더 개연성 있는 것이 됐다"고 지적한다. 또 "핵무기가 과거에 속하고 우리와 상관이 없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쿠바 미사일 위기의 결과로 시작된 핵 군축 과정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인. 463쪽. 2만4천원.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어떻게 넘겼나…"미·소, 핵전쟁 공포" - 4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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