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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토리] 신라의 벼루에 다리가 10개 이상 있는 이유

2022-06-2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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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재발견 ④ 벼루에 나타난 신라인의 문예사랑

(경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먹을 갈아 붓을 묻혀 글씨를 쓰는 도구인 벼루는 고대부터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상위계층만 이용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일반적으로 국내 유적지에선 벼루가 나와봤자 10점 이내로 적은 편이다. 그런데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경주 월성에선 벼루가 다량 출토됐다. 월성 내부 건물지에서만

140여 점이 확인됐고 왕궁을 둘러싼 연못인 해자에서도 수백여 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국가 주요시설에선 반드시 종이에 기록하는 일이 필요했기에, 벼루가 출토된 곳의 건물터는 그 시절의 주요 관청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신라 벼루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제가 대부분이며, 돌로 만들어진 석제, 나무로 만들어진 목제 벼루도 일부 확인된다.

특이한 점은 신라의 벼루가 동물 모양이 새겨진 화려한 무늬의 다리를 가진 것이다. 다리가 여러 개 있는 벼루를 '다각연(多脚硯)'이라 부르는데, 대각이 3개에서 많은 것은 10개 이상으로 다양하게 확인된다.

게다가 벼루 다리에 새긴 무늬도 화려한데, 동물 얼굴이나 발 모양이 주로 새겨져 있다. 이처럼 다리 개수가 많은데다 다리에 동물 모양이 새겨진 특수한 벼루는 특히 왕경 중심부에서 다량 출토됐다. 동물 모양의 다리가 여러 개인 '다각연'은 당시 왕실에서 사용한 높은 품질의 상품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벼루 기원은 어떻게 될까? 제작기술 및 형태적 영향 관계를 볼 때, 중국 수대·당대 벼루나 백제 벼루와의 관련성이 깊다. 초기의 신라 벼루는 고대 중국이나 사비기 백제 벼루와 비슷한 모양으로 제작되었으나 이후 동물 얼굴이 표현된 벼루가 도입된 후 신라 벼루의 대표로 자리 잡았다.

9세기가 되면 벼루는 소형화되는 경향이 있고, 대각이 짧아지거나 소멸하며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 휴대가 가능한 방형계 돌벼루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월성에서 출토된 벼루 다리에 있는 돼지와 도깨비 문양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대표 캐릭터를 개발했다. 바로 '꾸리'와 '두두리'다.

꾸리와 두두리는 2019년부터, 신라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주 월성을 소개하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해 오고 있다.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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